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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라 르 귄,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 이수현 옮김, 민음사, 2002
우리가 이상향(理想鄕)을 뜻하는 대표적인 말로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은 토마스 모어(그러나 그는 반역죄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반역죄로 몰리게 된 것은, 대법관이던 그가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한 것 때문에 ‘미운 털’이 박혀서였다. 영화 <1000일의 앤>은 당시의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가 쓴 《유토피아(Utopia)》(1516)라는 소설 때문이다. 그런데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합쳐서 만든 것이며, '좋은(eu-)', '장소'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좋은 곳은 없다'로 새겨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향을 꿈 꾼 사람은 모어뿐만이 아니다. 중국의 삼황(三皇 : 伏羲, 神農, 女와) 시대나 유태 신화의 에덴 등 거의 모른 신화에 이상향이 묘사되는 것은, 우리가 아주 먼 옛날부터,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부터 이상향을 꿈꾸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상향을 꿈꾸고 있으며, 멸종이 되는 그 날까지 이상향을 그리워 할 것이다. 또한 "이 길로 가야 이상향에 닿을 수 있다." "아니다, 이렇게 해야 이상향을 이룰 수 있다."며 끊임없이 싸우다가 멸종이 될 것이다.
어슐라 르 귄(Ursula K. Le Guin, 1929~)은 우리 독자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SF 독자들은 너무 잘 알고 있는, "만일 SF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탄다면 르 귄이 탈 것이다"라는 말을 듣는, 그리고 미국 현대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SF 작가다(SF를 허무맹랑한 오락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꼭 읽어 보기 바란다. 장르가 작품의 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작품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추방된 자들'이라고 옮겼어야 할 것이다)은 아나키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다.
우리 지구에서 11광년 떨어진 곳에 아나레스와 우라스라는, 서로가 달[月]인, 쌍둥이 행성이 있다. 이 두 행성에는 세티 인이라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우라스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우라스에서 태어난 오도라는 여자 사상가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투쟁 끝에 아나레스로 이주해서 아나키 사회를 이루어 살고 있다. 아나레스에는 국가, 법, 군대, 경찰 그리고 조직화된 종교, 돈, 사유재산, 결혼 등등 우리가 사회, 나아가 국가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하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제도가 아무것도 없다. 아나레스에서는 누구도 누구를 지배하지 않는다(구태여 지배라는 낱말을 쓴다면, 오도의 가르침이 그들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각자가 “사회의 구성원”이지 하나의 “집단”인 것도 아니다. 곧 개인이 존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다.
그들, 오도니안들은 “흥미, 재능, 능력에 따라 일을 선택”하며, 일은 “노동이며 동시에 놀이”다(“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에 대한 기대가 없는 행동” “누구든 필요한 일을 하고 그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의 기쁨”). 머리를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정기적으로, 자원해서, 몸을 쓰는 일을 하며, 마을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은 공동 침실에서 자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일인실이나 이인실(성교를 할 때나, 반려[서약 없는 부부]가 사용하는)을 사용하기도 한다. 교육, 의료 등은 물론 무료고, 필요한 것은 창고에서 가져다 쓴다(“존재가 정당성이며, 필요가 권리다”). 반려자가 없는 사람들은, 동성과 이성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든 마음에 맞는 상대와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가장 심한 욕이 “착취자” “소유주의자”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며, “그 책임이 곧 자유”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은, 무엇보다도, 검소하다. 우라스라는 행성이 “물고기와 꽃 없는 나무”밖에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곳이어서 산물(産物) 또한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나눔은 미덕이 아니라 생활양식이다.
그러나 《빼앗긴 자들》이 아나키 사회에 대한 묘사만으로 이루어졌다면, 정말 따분한, 무슨 체제 홍보용 소설 같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아나레스의 과학자인 쉐벡이 우라스로 망명을 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아나레스와 우라스 사이에는 정기적으로 우주선이 오가는데, 우주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닌 아나레스인과 우라스인의 접촉은 금지되어 있다(우라스인들은 아나레스의 우주항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 무역선은 사실상 “우라스의 광산 식민지”인 아나레스에 와서 광물을 실어가고, 대신 몇 가지 생필품을 주고 가는 화물선이다. 이 화물선에 승선한 쉐벡은, 오도니안들이 아나레스로 이주한 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우라스로 가는 아나레스인이 된 것이다. 반려와 딸을 남겨 두고.
시간을 뛰어 넘는 통신 기구, 몇 광년씩 떨어진 행성간의 동시 통신이 가능한 기계인 앤서블을 창안한 뛰어난 과학자 쉐벡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나키한 사람이다. 곧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쉐벡인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우리 사회보다 더욱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인 우라스(지구보다 훨씬 풍성하지만, “존재의 법칙은 투쟁”이며, “소유하는 것 외에 다른 관계를 모"르고 “그들 자신도 소유되어 있”는 사람들의 “지옥)로 가는 것은, 아나레스에 싹튼 관료주의와 전체주의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불이라는 과학자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니까 아나레스에도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는 곳이면 어디나 나타나는 병폐가 있는 것이다. 우라스(더 정확히는 우리 지구처럼 여러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는 우라스 행성의 에이-이오라는 나라)에서 쉐벡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이론을 에이-이오에서 독점하려는 속셈이 있어서 이고.
쉐벡은 대학에 갇혀 생활하게 되고, 어렵게 대학에서 빠져나와, 우라스의 오도니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노동자들의 시위(“혁명은, 당신들의 영혼 안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다”로 끝나는 쉐벡의 연설은 우리가 새겨 들어야 할 중요한 전언이다)에 참여했다가 지구 대사관으로 피신한 뒤에, 자신의 이론을 소유주의자들에게 파는 대신, 자유와 변화와 사람들의 결속을 위해, 곧 공통의 선(善)을 위해 쓰도록 ‘선물’ 하기로 하고 아나레스로 돌아가는 데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소설은 우라스와 아나레스가 한 장(章)씩 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우라스’에서는 망명한 쉐벡의 우라스에서의 생활(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아나레스’에서는 쉐벡이 망명을 하기까지의 아나레스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달 식민지가 지구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을 그린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 겹쳐지기도 하는 《빼앗긴 자들》은 독립된 장편이지만, 헤인 연작들 가운데 한 편이기도 하다. 르 귄의 헤인 인은 전 우주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조상이고, 지구(테라)도 그들의 식민지들 가운데 하나로 설정되어 있다. 헤인 연작들 가운데 또 하나의 걸작인 《어둠의 왼손》(이 책도 번역되어 있다)은 사람의 성(性)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게센 행성이 무대다.
1974년에 발표된 《빼앗긴 자들》을 나는 이상향을 가장 잘 묘사한 소설로 읽었다.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 “과다함”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우리가, “각각 홀로 고통 받아야 하는 고통 속에서, 굶주림 속에서, 가난 속에서, 희망 속에서” 그리고 “나누는 것 안에서“ 형제가 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확실히 불가능할 것이기에……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어디서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나레스에서 살고 싶소, am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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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mar : <빼앗긴 자들>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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