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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6-26 11:50:44 / Hit:1117  

드라마 올인(ALL IN)에 관하여

올 봄 최대의 유행어는 단연 ‘올인’이 아닐까 싶다.올인은 포커 게임에서 자신의 모든 칩을 밀어 넣고 승부를 본다는 뜻이다.
흔히 속어로 ‘다 털렸다’는 뜻으로도 통한다.
그래서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은 비장하고 황량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올인은 프로기사이자 세계적인 프로갬블러 차민수의 인생역정을 그린 드라마다.
그렇지만 드라마와 실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차민수의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소재를 차용해 제작진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처음에 주인공 이병헌과 지성 중 어느 쪽이 차민수인지 분간하질 못했다. 외모와 출생배경은 지성 쪽이 가깝고 성격과 인생의 행로는 이병헌 쪽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드라마 분야는 문외한이지만 나는 방영 초기에 제작진의 포석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시청율 때문에라도 드라마의 구조는 두 청년과 두 처녀가 얽히고설키는 멜러로 흘러가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미니시리즈 올인은 40%대의 시청율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드라마를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매일 TV 편성표를 훔쳐볼 정도였으니까.

‘올인’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이병헌, 송혜교, 지성, 박솔미 등의 호화 라인업에 임현식, 박원숙, 조경환으로 뒤를 받친 캐스팅도 단단하고 유철용 프로듀서와 최완규 작가의 배터리 호흡도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요소는 제주도와 라스베이거스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배경과 호화로운 세트였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막말로 도박의 세계를 TV에 담았다는 기획 자체가 승부수였다고 본다.

어찌됐건 드라마 올인의 방영으로 인해 그 동안 소문으로만 세계적인 갬블러로 알려졌던 차민수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고 사인공세에 시달린다고 하소연을 한다.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오고 그 바람에 나도 조역으로 병풍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차민수 스토리가 영화화되거나 드라마화 되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킬 거라 전망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아들로 자라 모든 운동과 예능을 두루 섭렵하고 그 어렵다는 프로기사의 관문을 뚫고 바둑을 두다 홀연히 미국으로 건너가 밑바닥 인생을 체험한 끝에 마침내 포커를 배워 세계챔피언이 된 그의 인생은 족적 자체가 환상의 드라마가 아닌가?

나는 그와 청년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오래된 친구이기에 누구보다도 그의 내력에 관해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영등포 극장주의 아들로 자라 어릴 때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누린 그였지만 천성적으로 모험심이 강한 차민수는 바둑의 세계에 빠졌다.
워낙 두뇌회전이 빨라 바둑을 배운 지 몇년 만에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었으며 어렵지 않게 프로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바둑의 승부만으로는 뜨거운 피의 열정을 식힐 수가 없었던지 미국으로 건너가 전문 갬블러로 변신한다.

물론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까지 그가 겪은 고초는 몇 줄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어려울 때 가까이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느 정도 갬블러로서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미국에 갈 때마다 그의 저택에 묵으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었다.
쾌남아 스타일의 차민수는 엄살을 부리지 못하지만 자신이 정말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었다.
“사람의 몸에 수분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 하루 종일 울었는데 눈물이 마르질 않고 펑펑 나오더라구.”

나는 그가 눈물의 양(量)에 관해 토로한 고백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포커 판에서 눈썹 근육 하나의 움직임도 절제할 줄 아는 포커페이스의 갬블러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다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차민수는 그런 사람이다.
풍부한 감성과 여린 심성의 소유자인 것이다.
물론 게임 테이블에서 그는 강인하고 잔인하며 와일드한 것으로 소문나있다.
그런 카리스마 뒤에 숨은 로맨티스트의 면모가 바로 차민수의 매력이다.
지미 차가 당대 최고의 천재 갬블러들과 겨뤄 놀라운 승률을 기록하는 비결이 혹시 그런 야누스적 양면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바둑에서나 또 다른 게임에서 혹은 인생의 중요한 승부처에서 우리는 비관적 올인을 선언해야 할 경우가 많다.
이길 확률이 별로 없는 승부의 갈림길에서 패배, 그리고 파산을 감지하며 남아있는 모든 것을 걸고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를 외쳐야 하는 장렬한 선택.
그 선택은 처절하지만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는 자기연민의 감정에 빠져 그 선택을 어떻게든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우리네들의 습관이기도 하다.

훗날 자세히 밝혀지겠지만 갬블러 차민수의 성공은 올인의 절묘한 활용에 있었다고 나는 감히 복기해본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모든 것을 던지는 배팅.
그 것은 곧 기세를 의미한다.
물론 아무 때나 올인을 쉽게 불러서는 안된다.
가끔씩 무서운 카드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올인의 묘를 누릴 수 있다.

내 바둑을 내가 거론하기가 조금 쑥스럽지만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뒤 나는 중요한 대국에서 번번이 올인 선언을 한 적이 많았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수읽기의 회로가 자꾸 얽혀 완벽한 바둑을 짜기는 어렵고 역시 긴박한 승부처에서 올인을 부르고 도끼질하듯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이나 평론가들이 내 바둑을 사납다고 표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초로의 기사가 야생마처럼 좌충우돌 날뛰는 것에 대하여 혀를 차지는 마시라.
이 나이쯤 되어서는 부드러운 행마와 흑백간의 조화로운 화합으로 화국(和局)을 연출하는 것이 보기에 좋을 것이나 나는 아직 완성된 장인이 아니다.
아직은 힘이 닿는 데까지 바둑의 본령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은 소년의 마음 그대로일 뿐이다.
언젠가 진정한 올인의 날이 오겠지만 그 때까지 무수히 크고 작은 올인을 각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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