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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베개 밑에 손을 집어넣고, 핸드폰을 꺼내 플립을 열었다. 벨소리는 여전히 시끄럽게 울려댔다. 핸드폰이 아니라, 집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이 시간에 누군가가 집으로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자친구는 언제나 핸드폰으로 걸었고, 더군다나 그와는 방금 전에 삼십분 정도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지 않았던가. 그는 몹시 졸음이 와서 더 이상 전화통화를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기가 놓여있는 책상 쪽으로 되도록 빨리 걸어갔다.
"여보세요?" 나는 송수화기를 들면서 책상 의자에 걸터 앉았다.
"자고 있었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물어볼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고 말지도 몰랐다.
"누구지?" 나는 책상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이어 전화를 건 쪽에서 내 이름을 대면서 통화중인 사람이 내가 맞는지를 확인했다. 나는 이번에는 "지금 전화를 걸고 계신 분은 누구시죠?"라고 경어를 써서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여전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상대는 아까 혹시 H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었냐고 물어왔다. H는 회사 입사 동기였다. 그녀가 열 한시쯤에 서류 제출 날짜를 확인하려고 전화를 걸었긴 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 이름을 대고, H와 통화하려고 다시 재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H가 자기 전화를 빌려서 나와 통화를 한 것을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J였다. J는 H의 남자친구이고 역시 나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H가 어째서 그런 남자를 사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엉뚱한 순간에 신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던가, 미스테리성 기사를 온종일 떠들고 다니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등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혀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스프링 연습장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연필꽂이에서 검정색 볼펜을 하나 꺼내서, 종이 위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몸의 무게중심을 뒤로 쏠리게 만들어 의자의 뒤 쪽 다리로만 무게를 받쳐 까딱까딱 움직이는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열한시까지 둘이서 뭐했어요?"
나는 장난끼가 가득 섞인 말투로 물었다. 이상하게도 전화를 끊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얘기를 진행시켜서 몇 분 동안 농담을 주고 받는 식의 대화를 나누다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떨어지자 나는 전화기를 들고 침대로 되돌아왔다. 베개에 이마를 묻고 시트 위에 엎드렸다. "그럼 월요일 날 봐요. 여자친구와도 통화를 해야 할 텐데, 전화를 끊어야 하지 않겠어요?"
"혹시 엎드려 있는 거예요?" 그가 물었다.
나는 조금 놀라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어떻게 알았죠?"
"목소리가 다르게 들려서. 혹시 그런가 짐작을 해본 거예요." 그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서 대답했다. 나는 그가 어떤 동작으로 전화를 받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쪽은 어떤 자세죠?" 나는 정말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어떤 여자가, 내 남자친구에게 '어떤 자세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느냐'고 묻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자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차라리 그가 대답하지 말고, 다른 얘기를 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한 것을 조금 후회하면서, 당신이 내게 외계인 얘기를 물어올 때마다 내가 드는 기분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는 식의 농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고 생각했다.
"나도 엎드려 있어요."
대답은 오늘 먹은 점심식사 메뉴가 무엇무엇이었다는 얘기를 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되돌아왔다. 나는 그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머릿 속에 그리면서, 천장을 향해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눈을 감았다. 전화기에서 나는 미세한 잡음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할 때 말이예요." 나는 엉뚱한 얘기를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나는 암흑같은 배경에 그 누군가를 우뚝 세워놓죠. 주위에 사물들이나 풍경, 사람들을 배치해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아요."
"그건 어떤 기분이 들게 하죠?"
"글쎄요,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군요."
"좋은 쪽인가요, 나쁜 쪽인가요?"
"좋은 쪽 같지는 않아요."
그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얘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천장을 쳐다보고 있으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천장의 벽지는 색이 바래고 얼룩이 져 있을 것이다. 어두웠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게는 천장의 벽지가 어떤 무늬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밤새 누렇게 얼룩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상대방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나는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화통화였으니까요."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 지낸 계절이 지금처럼 여름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렸다. 그 여름 이후, 나는 그와 모두 합쳐 세 번의 전화통화를 했다.
장마철이었는데, 나는 어째서인지 그 전날 밤을 세우고 늦게까지 잠들어 있다가, 오후 세네시쯤이 되서야 깨어나 뒤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도중에 그에게 전화가 와서, 나는 조금 있다가 다시 걸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고, 나는 밥을 다 먹고나서 침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는데, 일어났을 때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그 때까지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빌려놓은 비디오 테이프 세 개를 모두 보았다. 하나는 그가 좋아하는 독일 코미디였고, 두 개는 헐리웃의 로맨틱 드라마였다. 그렇게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는 중이야?" 나는 그렇게 물었다.
"아니, 지금 막 일어났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자고 얘기했고, 그는 네게 그 말을 하려고 밤을 샌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하고 말했다. '다시는'을 발음할 때는 꽤나 톤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한참 뒤에 나는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연락하라고 했다. 그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전화를 끊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먼저 끊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헤어지자고 한 것은 나지만, 그것은 내가 한 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해버렸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사실 나는 그 날 저녁에라도 당장 남자가 내게 다시 전화를 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두 달 쯤 뒤에 불쑥 전화가 왔다. 그는 먼저 나의 안부를 물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몹시 화가 나버렸다. 남자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내가 계속해서 화를 냈던 것 말고는 정확히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남자는 자신이 먼저 "다시 연락할게."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후에야, 더 이상 그의 전화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단지 정말로 순수하게 내 안부만이 궁금했을 지도 몰랐다.
마지막 전화는, 그가 '연락할게' 라고 말한 지 한 달쯤 뒤였다. 나는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당시에는 내게 그 시간에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어떤 얼굴도 떠올리지 않았다.
남자는 울고 있었다. 내게 계속 뭐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남자에게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의 밧데리가 떨어졌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나는 계속해서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화가 끊겨져 버렸다. 그리고 정말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남자는 아마 내 쪽에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그런 생각 같은 것은 아예 잊어버렸을 것이다. 벌써 7,8개월 전의 일이다.
"나는 엎드려 있어요. 침대 시트 위에, 윗배 쪽에 베개를 깔고, 팔꿈치를 시트에 괴고 고개는 약간 쳐들은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에 대해서 꼼꼼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수화기에 귀를 바싹 갖다댔다. 그는 몇 분간에 걸쳐 방에 놓인 가구의 위치를 설명해주면서, 사물들에 얽힌 사연 같은 것을 짤막짤막하게 곁들이기도 했다.
"그림이 그려지나요?"
"책상 위에는 뭐가 있죠?" 나는 대답대신 그렇게 물었다. 기분이 벌써 한결 나아진 뒤였다. 그의 책상 위에 뭐가 있는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하지만 그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설명하는 묘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에는 정말로 사심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궁금증에 사로 잡혀 있었다.
"H의 어린 시절 사진첩을 빌려왔어요. 그게 있습니다. 아직 다 보진 못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이제 기분이 좀 괜찮아졌나요?"라고 넌즈시 물어왔다.
나는 베개에 턱을 받치고 엎드렸다. "생각보다 성의있는 사람이로군요. 이런 일에 진심으로 대해줄 줄은 몰랐어요. 관심조차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했죠?"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느끼는 감정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귀찮아하는 것 같았어요, 더군다나 당신이라면 더욱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평상시 당신은 정말로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들만을 하고 있잖아?"
수화기를 통해 그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주는 것은 처음 들어봐요."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예의에 어긋난 건가요?"
"아니예요. 오히려 기분이 좋은 걸."
어느 쪽에서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나도 어느새 조금씩 반말을 섞어쓰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는 H에게 전화가 왔으니, 잠시 수화기를 든 채로 통화가 끝낼 때까지 자기를 기다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금방이라구요."
수화기를 통해 그가 H와 통화하는 목소리며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H의 웃음소리를 들으니까, 그가 어째서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지 않고 수화기를 든 채로 나를 기다리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J와 나는 지금 이 전화를 끊으면, 다시는 서로에게 전화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배게를 등에 받치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아까 설명해 준 그의 방을 머릿 속에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재미있게 들은 얘기는 형광등 스위치 바로 옆에 걸어놓은 액자에 관한 거 였다. 그의 집에 놀러와서, 방에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누르는 사람들은 한번씩 그 액자를 보게 된다. 그 액자에는 당연히 여자친구인 H의 사진이 끼워져 있는데 H가 그녀의 친구와 단둘이 찍은 것이다. H는 친구의 뒤 쪽에 약간 물러서서 찍은 모양으로,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앞 쪽에 서있는 H의 친구를 가리키며 그녀를 J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J쪽에서는 매번 그것을 되풀이해서 설명하기도 귀찮아져서 최근에는 다른 사진으로 바꾸어 걸려고 했는데, H는 그 사진이야말로 자기얼굴이 가장 잘 나온 사진이라며 그 사진을 계속 걸어두라고 끝끝내 우긴다는 거다.
"정말로 귀여운 여자예요." 나는 아까 그렇게 말했다. J는 신이 나서 그것에 동의했다. 나는 그 때 남자친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지금쯤 술에 취해서 쿨쿨 자고 있을 것이다. 양말을 벗고 자고있는 건지나 모르겠다. 의사가 요로결석 때문에 술을 많이 먹으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술자리에 한번 앉으면 절대로 적당한 선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다. 오늘도 내가 자꾸만 전화를 걸어서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닥달을 하자, "금방 일어날거야,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하고 말했다. 역력히 짜증이 난다는 말투였다. 그 말을 네 시간에 걸쳐 열 번 정도 반복하고,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택시 안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중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한 것이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나는 그가 몹시 취해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일까지 해야하는 작업을 무작정 미뤄둔 채 새벽까지 계속해서 술을 마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방금 전에 짜증을 냈던 것까지도 사과했다.
나는 다리 위에 덮었던 이불을 옆으로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방 문쪽으로 걸어갔다. 스위치를 눌러 방에 불을 켜고, 커피를 끓이려고 주방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 놓았다. 식탁 앞에 앉아서, 나는 문득 예전에 그가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핸들 쪽으로 몸을 웅크리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 놈의 요로 결석이 통증을 일으킨 것이었다. 나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그는 웅크린 자세로 어쩔 수 없이 계속 운전을 해야했었다. 나는 인상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눈과 코 주변의 모든 주름들이 일제히 굴곡진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금 혹시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잠깐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지만 전화기까지 갈 여력도 없을만큼 심한 통증일 지도 모른다. 전화라도 걸어볼까? 하지만 괜히 전화를 걸었다가 자고 있는 것을 깨워, 화만 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미리 진통제를 좀 사두라고 누누히 일렀건만, 내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설탕 그릇의 뚜껑을 덮고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휘 저으면서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연습장 위에는 여러 가지 글씨체로 휘갈겨 쓴 낱말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위에 잔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전화기를 도로 가지고 와서 의자에 앉았다. 수화기를 귀에 갖다대니까, 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삼 년전 쯤에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1,2위를 다투던 발라드 곡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전화 통화는 잘 했나요?"
"물론이죠. 어딜 갔다 온 거예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오지 않으면 전화를 끊어야 하나보다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내가 커피 이야기를 하자, 그도 커피를 마시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지금 막 물을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H에게, 나와 전화통화하고 있다는 것 말했어요?" 나는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아니요. 그러고보니 우연하게도 오늘은 무얼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았네요."
"알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죠?''
"질투가 심한 여자라구요."
"H가요?"
"그럼요."
"여자들은 다 그런가봐요." 나는 잠시 기분 나쁜 일들을 떠올렸다가 마음을 누그려뜨렸다. "나도 질투가 아주 심하다구요."라고 덧붙였다.
"저는 질투심 때문에 화가 나서 주먹으로 벽을 친 적도 있어요. 덕분에 마루의 벽에 조금 부서져나가서 일부러 달력을 걸어놓았죠. 어떤 녀석이 자꾸만 H에게 전화를 걸었거든요."
"H는 바람을 피우거나 할 여자로 보이지 않아요. 그건 당신 쪽도 마찬가지구요. 이미 회사 안에서는 둘이 결혼을 할 거라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고, 둘 사이가 워낙 좋아보이는 게 아니라구요." 나는 커피 잔을 입에 갖다댄 채로 말했다. 커피와 설탕이 아주 적당하게 녹아져 있었다.
"이 시간에 내가 당신이랑 이렇게 전화하고 있는 걸 알면, H는 당신을 죽이려고 들지도 몰라요." 그가 괴기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놀렸다. "뭐 그리 나쁘진 않네요. 스릴이 있잖아요?"
그는 기분좋게 웃었다.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내가?"
"이상한 일이죠. 나는 평소에 당신을 남자로서, 매력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구요. 그런데 말이에요,"
나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커피잔의 손잡이를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는 지금쯤 설탕과 커피가 담긴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죠?"
"물을 붓다가 뜨거운 물을 발에 엎지르고 말았어요. 아, 상처가 남을 것 같군요."
"깜짝 놀랐어요. 집에 화상용 연고 같은 것 없나요?"
"이 집구석이라면,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설탕이 있다는 사실에도 감사할 지경인 걸요." 그는 아픈 것을 겨우 참고 있는 목소리였다.
"가까운 거리라면 갖다 줄 수도 있을 텐데. 아쉽군요." 나는 화장대 서랍을 바라보았다. 맨 아래 서랍에 구급용 약 상자가 들어 있었고, 작년 여름에 화상에 바르는 연고를 두 개나 사다 넣어두었었다.
수화기를 통해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슬그머니 의자에 앉았다. 서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가 오른쪽 발을 부여잡고 찬물에 담그는 모습을 떠올렸다. 화상을 당한 쪽이 오른 발인지 왼 발인지 알고 있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는 오른 쪽 발에 흉터가 있다. 언젠가 나란히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의 맨 발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었다. 남자는 발 등에 난 몇 개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군대에 있을 때 피부염을 앓았다고 말해주었다. 봉와직염인가 뭔가 하는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그 이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무엇보다도 대열에 맞추어 이동할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군화를 신고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웠는데, 발을 맞추어 가자니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구." 나는 칠년 전 쯤의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았었다. 군복을 입고, 염증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가 떠올린 것은 아마 칠 년 전의 그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 준다고 해도, 나는 그 때의 그 사람을 영영 또렷이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군대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르고, 그 때의 그의 얼굴도 모른다. 사진을 본다면 아마 조금 도움이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전 그의 방에 불이 났을 때 앨범이 통째로 타버렸기 때문에, 사진같은 것이라곤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괜찮은 거예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기 나, 사람을 찌른 적이 있어요."
화장실 안이라 그런지 그의 목소리가 울려서 들렸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이 정말로 죽을까봐, 겁을 잔뜩 먹었었어요."
나는 그에게 무언가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한밤중이라서, 스테인레스 샤시 긁히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그에게 위로를 한 것인지,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충격을 먹지 않았다는 것인지. 대답해 놓고 보니까 어쩌면 찔린 사람은 괜찮다, 살아 있다는 얘기같이 들렸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언제 있었던 일인지, 왜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무리지어졌는지 그런 것들은 묻지 않았다. 그 쪽에서도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화장실에서 데인 발을 물에 담그는 동안, 그는 문득 과거의 그 장면을 만났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 언제 그랬는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그런 것은 이미 잊어버렸거나,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중요한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냥 자기가 누군가를 찔렀던 것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그 때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자기 몸이 얼마나 심하게 떨렸었는지 그런 것들이 문득 말이다. 위로하겠다는 심산으로 일부러 칭찬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지금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 전화통화는 내 인생에서 최고였어요. 당신이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나는 정말로 그랬어요. 훌륭한, 그래요 훌륭하다고 할 만한 통화였어요"
"고마워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 한글자한글자 되새김질이라도 하듯이 또렷하게 다음 문장을 말했다. "최고의 칭찬이예요."
"아마, 이건 내일 회사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겠죠. 분명 그럴 거예요. 그리고 내일이나 다음주, 혹은 이 전화를 끊고 한 두 시간 후에라도, 또 아주 시간이 많이 지나서 우리가 서로에게 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할 수 있는 환경이 되더라도, 나는 지금과 같은 통화를 되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최고의 통화중인 거죠?"
"그래요, 아직은 최고의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죠."
그리고 나서 10분정도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전화를 끊고나서 커피를 한잔 더 만들어 책상 위에 앉았다. 커피 잔을 놓았던 연습장의 자리가 우글쭈글해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맞추어 다시 종이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탓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출근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자 두는게 나을 것이다. 벌서 새벽 3시가 훨씬 넘었다. 밤을 새면 여지없이 다음날 작업에 착오를 일으키고 만다.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그리고 침대구석으로 몸을 붙였다. 하지만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으니까 괜히 오줌이 마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주방을 지나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세면대 앞에 서서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얼굴이 조금 부어있었고, 이미와 콧잔등에는 기름기가 돌았다. 침대 위에서 뒤치락거리느라고 그랬는지 머리카락이 엉클어져 있는 것이 가장 눈에 거슬렸다. 나는 팔을 뒤통수 쪽으로 뻗어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고 있던 핀을 풀었다. 어깨 밑으로 머리카락이 흘러 내렸다. 한참동안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다가 다시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핀을 꽂았다.
남자친구는 아까 나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나는 삼 십년이나 나를 데리고 살았다구. 이 기분을 알아?"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또다시 되물었다. 나는 알 것 같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나도 나이에 대해서나, 나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될 떄 드는 어떤 기분이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기분이란 것은, 아마 내 것과 비슷한 그만큼 또 다를 것이다. 내가 짐작하는 기분은, 그가 느끼는 기분이 아닐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기분을 느껴보고 그가 어떤 기분인지 아냐고 물었을 때, 공감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이런 방법도 있다. 그 기분을 안다고 그냥 거짓말을 해버리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이런 종류의 대화를 할 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다시는 그렇게 많이 술을 먹지 말아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술을 많이 마시고 통화를 했던 날이면, 매번 화를 내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평소처럼,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하지도, 너도 술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되물어 농담조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얘기를 좀 더 나누었다. 그는 자꾸만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술을 꽤나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나는 통화 내내 그의 질문을 되풀이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이 기분을 알아?"
나는 거울을 향해 정면으로 얼굴을 들고 그 문장을 발음하는 내 입모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삼십년이나 나를 데리고 살았다구, 이 기분을 알아?"
전화통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위로할 만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화통화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내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장실에 갔다오니까,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눈이 뻐근하게 아파 왔고, 어깨와 허리근육이 조금씩 당기는 것도 같았다. 지금부터 잔다고 해도 겨우 두세시간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어깨를 주무르면서 침대시트 위에 걸터 앉았다. 몹시 피곤한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방창문을 열었다. 창 밖은 어느새 회색빛이 섞인 하늘색으로 바뀌어있었다. 네모난 창 밖 배경을 새 한마리가 재빠르게 가로질렀다. 나는 새의 형태를 확실히는 보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도 빨랐다. 어떤 색깔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언듯 눈에는 검정색으로 비쳤지만, 어쩌면 짙은 갈색이거나 푸른 색 점무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클랙션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리가 비에 젖어 있어서인지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들렸다. 어쩌면 비에 젖었기 때문이 아니라, 새벽이기 때문인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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