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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27 02:34:36 / Hit:1921  

문명은 어떻게 공포를 극복하는가? - <지구가 멈추는 날>

  가장 좋아하는 SF 영화 중 하나인 <콘택트>의 엔딩은 이렇다. 천체관측소를 견학온 학생들이 여주인공인 조디 포스터에게 묻는다. "정말 지구 외에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있을까요?"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물론이지. 그렇지 않다면 정말 엄청난 공간의 낭비(hell of waste of Space)이게." 이것은 외계인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인류가 할 수 있는 가장 위트 넘치는 대답이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근에 보게 된 <지구가 멈추는 날>은 <콘택트>가 던진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만약 외계의 지적 생명체가 우리를 찾아온다면, 그들은 인류에게 적대적일까 아니면 우호적일까?" 두 영화의 대답은 같다. "그들은 당근 인류에게 우호적일 것이다." 나 역시 그 대답에 동의한다. 왜일까?

  두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약간 변주해보자. "문명, 즉 우월한 문명이란 무엇일까?" 문명이란 '이해'다. 무엇을 통한 이해? 바로 '지성'을 통한 이해다. 그 이해의 효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포의 극복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자에 대한 공포의 극복이다. 좀 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던 타자를 이해하고 소통하게 됨으로써 스스로가 지닌 공포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문명이란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문명의 발전이란 특정한 존재자(지구말로는 '인류')가 그들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한다는 의미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이렇다. 고대의 인간은 번개를 두려워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개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파우스트 이전의 인간들은 악마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악마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이해했던 파우스트는, 더 이상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몇몇 종교적 인간들은 믿음을 통해 이를 구현한다. 그들의 믿음이 지성으로 검증되기만 한다면), 인간은 죽음마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반의 과학소설에 나타난 외계인들은 하나같이 인류에게 적대적이다. <화성침공>이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침략이다. 그러나 이 모습은 20세기 초에 인류가 저지른 끔직한 파멸에 대한 외향적 투사(objection)에 불과하다. 1차, 2차 세계 대전의 목적이 무엇이었나? 제국주의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침략이었다. 파시즘은 왜 모든 유럽의 지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나? 그 폭력의 근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공포에 대항하기 위한 인류의 발명품이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미국은 왜 괴멸 직전의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나?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와 '옥쇄'로 대표되는 일본군의 생명관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자폭탄은 이후 50년을 지배한 또 다른 공포의 근원이 되었다. 냉전 시대의 문명이란,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그 극점에 다다른 히스테리의 문명이다. 상대 진영보다 더 많은 핵무기를 보유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제로섬 게임이었다. 그 게임의 끝이 인류의 종말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죽음의 질주였다. 필립 K. 딕의 <두번째 변종>이나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그는 어찌하여 걱정을 멈추고 원자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 그 밖에도 냉전 시대에 창작된 무수한 소설과 영화에서 보여주던 종말적 세계관은 이 공포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 공포를 다시 극복하였다. 냉전 시대의 종식을 우리는 '데탕트'라 부른다. 데탕트는 '화해'란 뜻이다. 물론 이 화해는 한쪽의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화해였지만, 이제 인류는 더 이상 핵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핵무기의 개발을 인류가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했다. 그러나 1945년 그 상자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인류는 그 행위의 결과가 가져올 파멸을 이해했다. 우리가 이해한 것은 이렇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만큼 저들도 두려워한다는 것. <크림슨 타이드>의 덴젤 워싱턴의 말을 빌자면, 핵전쟁의 진정한 적은 상대 진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는 것. 이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에 아무도 발사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스탈린도 누르지 않았고, 레이건도 누르지 않았고, 앞으로의 김정일(그가 발사 버튼을 갖게 될지는 심히 의문이지만) 또한 누르지 않을 것이다.

  핵전쟁의 공포를 극복한 인류의 문명이 맞이한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비약적인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이다. 공산주의 진영이 무너진 후로 세계는 급속히 전지구적 자본주의화(한국말로는 '세계화')되었고 인류의 문명에는 자욱한 거품이 끼게 되었다. 이 거품은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탐욕'이다. 이 탐욕을 현실태로 바꾸는 토대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적 물신화에 의한 모든 '가치'의 상실이다. 이 탐욕은 이제 21세기 인류의 새로운 공포, 우리가 이 행성을 통째로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왔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연과 조화하지 않는 유일한 포유류다. 그들은 한곳에서 모든 생명체를 빨아먹고(consume) 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이렇게 생존하는 유기체가 단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이러스다."

  2008년에 리메이크 된 <지구가 멈추는 날>이 위치하는 지점이 여기다. 1951년의 원작에서는 지구 멸망의 원인이 핵전쟁이다. 그러나 21세기 멸망의 원인은 환경 파괴다. 그렇다면 인류는 결국 스스로가 불러온 재앙으로 인해 사라질 것인가? 아니다. 문명은 다시 공포의 원인을 이해하고 제거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것이다. 우리의 자본주의적 탐욕이 지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보편적 이성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문명은 공포를 이겨내고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것이다. 이러한 지성의 발현은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대부분의 문명국에서 환경의 보호는 이미 산업의 발전보다 우선되고 있다. '대부분'의 문명국에서 말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을 뒤집어서 해보자. 인류가 닥쳐올 재앙을 극복하고 우주로 진출해서 다른 행성에 거주하는 낯선 지적 생명체를 발견했다 치자. 그 외계 문명은 아직 우리보다 덜 진보했다 치자. 그럼 인류는 그들을 위협으로 간주할 것인가? 혹은 그 행성을 침략해서 그들을 노예로 삼고 자원을 약탈할 것인가? 인류는 이미 지난 20세기를 통해 그런 야만적 행위가 불러올 결과를 몸소 체험했다. 우리의 지성은 야만의 반복을 허락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발전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이다.

  언젠가 우리를 찾아올 외계인들 역시 그럴 것이다. 그들이 머나먼 우주를 건너 지구에 도착할 문명을 지녔다면,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대신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지성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들 역시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보다 높은 문명의 차원에 이르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이 지레 겁먹고 먼저 핵미사일을 쏘지나 말기를 바랄 뿐이다. ㅎㅎ


+)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당신의 생각은 너무 '지구'적인 관점이다. 외계인 문명의 발전이 지구의 인류와 유사할 것임을 어떻게 장담하나? 20세기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은 사실은 양대 세계 대전 때문이 아니었나? <마크로스>의 젠트라디 문명처럼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을 통해서 발전하는 문명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우주 보편성의 법칙'으로 답하겠다. 예를 들면 이렇다. 모든 별들(항성이나 행성들)은 '구'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이유는 빅뱅 이후 가스가 고체로 굳는 과정(즉 별의 생성 과정)이 필연적으로 구의 형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별들은 자전하며, 질량에 비례하는 중력을 갖는다. 즉 지구에서 발견된 물리 법칙은 (블랙홀에나 빠지지 않는 한) 우주의 모든 곳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물리 법칙이 그럴진대, 문명의 발전 법칙이라고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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