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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이 그려진 카드를 펼쳐 '축하한다'라고 쓴다. 아랫줄에 날짜를 적고 싸인을 하고나서, 글자들을 한참 쳐다보았다. 내 이름 옆에 나란히 케이의 이름을 적으려고 하다가 그만둔다. 펜촉을 댄 채로 망설이는 동안 종이에 잉크가 배어들어 싸인 옆에 작고 검은 동그라미가 하나 생겼을 뿐이다. 입김을 불어 잉크를 말린 후에 카드를 봉투 안에 집어 넣었다.
케잌은 제이가 좋아하는 바나나 생크림으로 골랐다. 할인카드가 있었기 때문에 삼십퍼센트나 가격을 할인받을 수 있었다. 아직 서른이 안되어 보이는 제과점 여주인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행사기간이라 샴페인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고 말했다. 포장하는 솜씨는 서툴렀지만 정성이 담긴 손놀림이었다.
제이의 집은 이층의 양옥 건물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제이는 여섯 살 때부터 결혼까지 한 지금까지 줄곧, 그러니까 자그만치 이십년동안이나 그 집에서 살았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부모님, 남동생과 함께 였고, 작년에 남동생이 입대한 이후로 남편인 p를 새 인원으로 맞이하여 다시 네 식구가 되었다. 제이는 부모님이 마침 주말여행을 가셨고, 결혼을 한 뒤에는 집에서 모일 기회가 몇 번 없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파티를 열고자 한다며 친구들을 초대했다. 마침 결혼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있다고도 했다. "선물은 바나나 케잌이다. 뚜르상뜨 베이커리의 23호짜리로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제이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대문을 녹색 페인트로 새로 칠한 것 외에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무 문패에 제이의 아버지 이름이 새겨져 있고, 제이가 중학교 미술시간에 만들었다는 우편 바구니에 근처 쇼핑센터의 광고지가 꽂혀 있었다.
벨을 누르기도 전에 건물의 옥상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제이였다. 나는 제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선 제이의 단발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23호짜리야, 제이" 나는 케잌을 들어올리고 손바닥을 둥글게 모아 확성기 모양으로 만들고 나서 거기에 입을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제이는 전화에 대고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아주 재밌고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웃음이다.
녹색 페인트 칠을 한 대문이 열리며 p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육칠개월 만이었는데, 상당히 살이 많이 쪘다. 나는 아저씨가 다 되었다고 농담을 하며 케잌을 건낸다.
"뭐 이런 것까지 사가지고 온거야? 부담스럽게." 피가 자기엉덩이를 툭툭 두드리고는 케잌 상자를 받아들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강아지 한 마리가 p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따라붙었다. 제이 부부는 동물을 좋아했다. 전에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다시는 동물을 기르지 않겠다고 제이는 말한 적이 있었는데 벌써 새 강아지를 키우고 있나보다.
"또 강아지를 키우네요?"
p는 강아지의 이름이 '장고'라고 가르쳐 주었다.
"집을 잃어버리고 쓰레기통 주변이나 얼씬거리고 다니는 걸, 제이가 데려와서 기르고 있지. 어디서 그랬는지 다리를 절어요."
p는 자기가 강아지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가운뎃 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긁적거렸다. 자세히 보니 마르치스 종인데, 오른쪽 앞다리가 다른 다리보다 조금 짧았다. 움직일 때마다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했다가 다시 일어선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주 귀여운데요." 등을 쓰다듬어 주려고 다가갔는데 강아지는 p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짙은 갈색 털에 윤기가 흘렀고 종긋 세우고 있는 귀의 모양이 영리해 보인다. 몸을 구부리고 팔을 내밀어 안아보려고 했지만 역시 내게는 안기지 않고 p의 뒤로 몸을 숨긴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겁이 아주 많아요. 제이랑 나를 제외하면 사람에게 잘 안기지 않을 정도니까. 먼저 옥상으로 올라가 있어요. 난 냉장고에서 맥주를 좀 더 꺼내 올테니."
강아지는 p의 뒤를 좇아 달려갔다.
계단에는 난간이 없어서 조심해서 한칸한칸 발을 옮겼다. 계단을 다 오르자 제이가 달려와 손을 마주 잡았다.
"잘 지냈지?"
"벌써 이주년이라니. 대단해."
"겸사겸사 다들 한번 보자는 뜻이지. 따로 날을 잡지 않으면 이젠 다들 바빠서 한번 모이기도 어려우니까."
옥상 한 가운데에 하얀 플라스틱으로 된 간이 테이블이 옮겨져 있고, 케잌이 하나, 과일과 과자가 담긴 접시들, 그리고 유리컵과 수저가 각각 여섯 개씩 놓여져 있었다. h와 l은 벌써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지각하는 건 학생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그래!"
언제나 유쾌해 보이는 h쪽이 한 손을 들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흘겨보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누군가의 자리가 하나 빈 것 같은데?"
"그 녀석은 어딘가에서 준꼬와 데이트라도 하고 있을 거야. 그 일본 여자한테 온통 정신을 빼앗겨서는 다른 일은 뭐가 되든지 안중에도 없다니까."
o가 새로 사귀는 여자가 일본인인 모양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진 날이 춥지 않으니까 여기서 좀 마시다가 내려가자구. 우리 말야, 면세점에 가서 맥주란 맥주는 종류별로 모두 쓸어왔어."
제이다. 신이 난다는 말투였다.
"간만에 배부르도록 마시겠는데."
"이제 모두 모였네. k, 어서 이쪽으로 와." 제이는 옥상의 난간 저 끝을 향해 외치고는 곧 네 귀에 대고 속삭였다. "벌써 삼십분도 더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뭐야."
옥상의 난간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던 검은 형체가 몸을 일으켰다. 뒤로는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앞쪽으로 길었다. 케이는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태연하게 내 옆에 섰다.
"잘 지내?"
내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하며 피식 웃었다. 그때 나는 그의 턱 밑에 난 작은 상처를 보았다. 이전에는 없던 상처였다.
먼 공장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이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층을 향해 몸을 숙여 p더러 빨리 올라오라고 소리를 치고 있다.
"가서 좀 나르는 걸 도와줘, 게으름뱅이 같으니."
제이가 h를 향해 소리지르고, 곧 h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일층으로 뛰어내려 갔다.
"조금만 마셔."
"춥지?"
제이가 목을 움츠리며 내 쪽을 바라본다. 제이는 벌써 얼굴이고 귀고 목이고 할 것 없이 붉게 술이 올랐다.
"밤엔 생각보다 많이 쌀쌀하네."
"잠바라도 갖다줄게."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내려가."
p는 진심으로 염려되는 얼굴이다. 제이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아이를 가졌어."
p는 여전히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들은 동시에 마시던 잔을 입에서 떼며 p를 바라보았다.
"실은 내년쯤이었으면 하고 바랬었는데."
p가 맥주잔을 입에 갖다대며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축하해."
k가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모두들 조금쯤 상기된 얼굴로 잔을 부딪쳤다.
나는 제이가 가져다 준 점퍼를 입고, 맥주를 한 병 더 땄다.
"저건 뭐야." h가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 사람 계속 저기서 우리 쪽을 지켜보고 있어."
h가 가리킨 곳은 건너편 단독 주택의 옥상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 쪽을 향해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어두워서 실루엣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는데, 덩치로 보면 남자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옥상 난간에 가려 허리 아래로는 볼 수 없었고, 각진 어깨와 다부진 등판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얼 하겠다고 옥상에 올라와 남의 집이나 들여다 보고 있는 거지?"
"할 일이 없나보지. 마누라 잔소리를 피해 옥상에 올라와 있는 중이던가."
"어쩐지 기분 나쁜 걸."
"신경 쓸 것 없어."
"근데 o말이야, 정말 일본여자한테 빠져서 데이트하며 지내는 거야?"
누군가 o 이야기를 꺼냈다.
"o 얘기라면 그만 둬. 좋은 놈이 아니야."
k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막았고, 바람이 대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어째서 과민반응이야, 이 친구."
p가 허허 웃으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이미 기분이 얹잖아진 뒤였다. 나는 k의 안색을 살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지만 묻지 못했다.
나는 케이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하지만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케이의 얼굴은 벌써 붉으스레 달아올라 있었다.
"귀걸이가 없네?"
케이가 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올리며 묻는다.
나는 어디에선가 흘린 모양이라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k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왼쪽 귀에 이어링 없이 귀를 뚫은 자국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그러면서 나의 귓불을 만지려고 한다. 나는 간지럽다고 핑계를 대며 몸을 뒤로 빼내었다.
언젠가부터 o는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아무도 말을 꺼내려 하지 않는다. 꺼내려 하지 않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애써 말을 막으려고 쉿쉿거리고 있는 거다.
"정말 귀여운 놈이야." 장고는 제이의 품안으로 달려들 듯이 파고 들었다. 제이가 장고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 한쪽 눈을 잃었어."
제이는 강아지를 들어올려 한 팔로 앉고 오른쪽 눈가의 털을 쓰다듬었다. 거기에는 눈이 있었던 흔적이라고도 없었다. 흉터가 있을 테지만 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k가 눈을 찡그렸다.
"그러지 마, 제이. 뭐 좋은 구경거리라고." p다.
"뭐 어때서. 난 이 녀석 만큼 영리한 강아지는 처음이야."
제이는 장고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갖다대었다.
"처음에 데리고 왔을 때는 털도 죄다 빠져있는 상태였어."
개를 꽉 끼어 안으며 제이가 계속 해서 얘기했다.
"이것 봐. 저 사람 아직도 있어. 뭐지, 도대체?"
"사람이 아냐. 기둥 위에 장식이 얹어져 있는 게 마치 사람 머리처럼 보이는 거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잖아, 안 그래? 그래, 이제 보니 저건 그냥 굴뚝일 뿐이었잖아."
"사람 같은데."
k는 영 기분 나쁘다는 얼굴이다.
"자, 자, 신경쓰지 말자고. 사진이라도 한 장 어때?"
"좋아."
우리는 옥상의 난간에 앉았다. 제이가 개를 안은 채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사진은 k가 찍기로 했다. 내가 찍겠다는 걸 말리고 굳이 자기가 카메라를 집어든다. 주인공인 제이 부부가 어깨동무를 하고 앉은 왼편으로 h와 l이, 그 오른편에 내가 선다. 나는 팔을 올려 귀걸이가 빠진 귓불을 만졌다.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른쪽 귀걸이를 마저 빼내어 손에 쥐고 제이 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환하게 웃고 싶었지만 얼굴이 점점 경직되어 갔다. 케이는 하나 두울 셋, 하더니 플래쉬를 터트렸다. 카메라가 k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순간, 어둠 속에서 나는 k의 입술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표정은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웃는 얼굴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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