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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문학 전공자이지만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세부전공이 시라서 그런 건 아니다. 물론 시야말로 가장 고상한 장르이지만(나는 늘 소설 전공자들에게 "소설 나부랭이들"이라고 부르는 버릇이 있다. ㅎ), 우리의 일상이 늘 시적 고상함으로 채워지는 건 아니잖는가. 사람이 밥만 먹고는 못 살듯이, 시만 읽고는 살 수 없다. 소설도 읽어줘야 한다. 그런데 요즘의 한국 소설들은, 맛이 없다. 맛이.
왜 요즘의 한국 소설들은 읽을 맛이 안나는가? 죄다 세태소설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태소설 중에서도 좋은 소설들이 있다. 멀게는 채만식의 <태평천하>나 박태원의 <천변풍경>, 가깝게는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과 같은 소설들. 어떤 면에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산문성은 '세태'에 대한 인식을 기본으로 한다. 즉 모든 소설의 바탕은 세태소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태소설이라도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작가가 '세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에 따라 여러가지로 구분된다. 좋은 세태소설은 작가가 세태와 갈등하고 비판하며 그것을 넘어설 때 탄생한다. 즉 '세태'에 대해 쓰면서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을 때이다. 그렇다면 과연 요즘의 한국 소설들은 이런 '넘어섬'을 보여주고 있는가?
물론 '아니오'다. 뭐 거기까지라면 괜찮다. 소설가라고 다 거장이 될 수도 없는 것이고, 고만고만한 세태소설이라도 읽기에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좋은 세태소설의 부재가 어쩔 수 없는 수동성을 넘어서, 일종의 적극정 능동성을 가지고 창작되며 조장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출판업계가 조장하는 상업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많은 소설가와 평론가들이 그 상업성을 문학성으로 포장하는 일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밝히고 넘어갈 점은, 나는 문학의 상업성에 알레르기 반응을 지닌 그런 염결주의자가 아니다. 문학은,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는 충분히 상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점차로 상업적으로 변해가는 일이 서사장르로서의 소설이 지닌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즉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스토리텔링(영화든 연극이든 TV 드라마든 테마파크든)에 기본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일이 소설의 외양을 확장하는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그 상업적 확장의 내용물('콘텐츠'라고 쓰려다가 보다 넓은 의미에서 내용물이라고 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소설을 콘텐츠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텍스트가 아닌가. 그 텍스트를 다른 미디어로 전유하면 그것을 텍스트의 콘텐츠화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이 지닌 헤게모니다. 그리고 최근 한국에 넘쳐나는 세태소설들이 복속하는 헤게모니는 '현실에의 순응'이다. 어떤 현실? 자본주의적 현실. 보다 더 자세하게는 소시민의 소비적 일상. 요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이 현실과 일상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현실 안에 안전하게(혹은 윤택하게) 머물려고 노력한다.
왜 그럴까? 그 자체가 작가들의 일상이고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상과 욕망은 동시대의 동세대와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요즘의 한국 세태소설의 상업성이 발생한다. 한국처럼 인민들이 책 안읽는 나라에서, 그나마 소설이라는 상품을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주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들이다. 20대 초중반에 매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꼬박꼬박 사고 하루키 전집을 소장했던 사람들이 현재 한국의 문학을 먹여살리고 있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이들이 읽고 싶은 소설을 출판한다. 그것도 거창하게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문지 문학상 수상작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 1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상금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세계문학상 수상작 2회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4회 백영옥의 <스타일>, 그리고 뒤늦게 출발한 창비문학상 1회 수상작인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 이런 소설들 말이다. 세태를 민감하게 반영하고 주소비자층의 공감을 얻어낸다는 점에서 이 소설들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 뿐인가. <달콤한 나의 도시>와 <스타일>은 TV 드라마로, <아내가 결혼했다>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추가적인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나는 지금 이런 소설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런 소설들에게 문학상을 수여하는 출판사들의 행태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상업성이나 상업주의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내 비판은, 그 상업성과 상업주의에 좀 솔직해져보라는 거다. "그래, 우리 잘 팔리는 소설을 쓰고 출판해서 베스트셀러 만들려는 거야. 그래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이라는 주 고객층을 목표로 문학상이라는 타이틀 얹어서 소비사회에서 욕망과 일탈의 꿈을 꾸는 주인공을 내세운 세태소설들을 양산하는 거야. 요즘 사람들이 읽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일들과 고민들을 소설로 쓰면 좋잖아?" 이렇게 말하라는 거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나는 출판사든 소설가든 (덤으로 얹혀가는) 평론가든 최근의 여러 세태소설들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다들 온갖 거창한 미사여구로 한국문학의 탁월한 성취니, 우리 소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니,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니 지껄여댄다. 이런 광고문구나 다름없는 심사평이나 평론을 쓰는 문학인들은 안부끄러울까? 정말로 자기들이 뽑은 그 소설들이 탁월한 문학성을 지닌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생각하나? 꼭 그렇게 '순수문학'의 아우라를 씌워서 상업성을 가려줘야 더 잘 팔리나? 그냥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세태소설이다"고 솔직하게 평가하면 안되나? 상업성이나 상업주의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그걸 고상한 예술행위로 포장하는 이 속물적 근성과 스노비즘(snobbism)이 나쁜 거다. 한국의 문학 평론가들은 추리물이나 SF, 판타지, 무협, 스릴러 등의 장르 소설들은 순수문학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얕잡아보면서, 하등 다를 것 없는 장르적 속성을 지닌 최근의 세태소설들에는 출판사라는 문학권력의 후광을 빛내주며 경배하는 것이다.
소설가는 자신이 쓰고 싶고 쓸 수 있는 것만 쓰면 된다. 그리고 다양한 소설가들이 다양한 소설들을 쓸 때,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길이다. 그 다양성 안에서 세태소설이든 장르소설이든 거장의 걸작이든 각각의 가치와 높낮이를 갖는다. 내가 현재의 한국 소설에 <그리스인 조르바>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세태를 비판하고 뛰어넘어서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그런 걸작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 소설의 방향성은 명백하게 상업적인 세태소설로 흐르고 있다(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장르소설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미국과 비교하자면, 현재 미국 소설의 주류는 범죄스릴러물이라는 장르소설이다. 많은 범죄소설들이 코폴라나 스콜세지, 이스트우드 같은 거장 감독들의 손에 의해 매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는 미국의 대도시들이 지닌 익명성의 문화와 인간관계가 범죄와 스릴러의 물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장르소설화가 소비사회에 대한 세태소설로 나타나고 있다. IMF 이후 급격한 자본화(신자유주의화)의 길을 걸으면서 경제적 주체로서의 자립이 불안정해진 일군의 젊은 세대들(386 후일담 세대들보다 5-10년 늦고, 88만원 세대보다 5-10년 쯤 앞선 세대들)이 지닌 자본주의적 욕망과 불안. 이것이 요즘 한국소설의 대세를 이루는 세태소설의 토대가 된다).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평가를 내리는 작업을, 평론가들은 왜 못(혹은 안) 하는가? 그거 일종의 직무유기 아닌가? 직무유기를 넘어서 세태소설의 상업성에 '예술적 가치'라는 분칠을 칠해주는 행위는, 일종의 범죄 아닌가? 한국의 문학 전공자들이여. 우리 이제 제발 좀 솔직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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