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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6-12 14:33:55 / Hit:2508  

1인칭 소설 (3)

그 날 이후, 볼 것은 더욱 많아졌다. 탱크만 하더라도 한 두 대가 아니라 수십 대가 한꺼번에 나타나 쇠바퀴 소리도 웅장하게 시가를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아스팔트 도로가 규칙적인 무늬로 푹푹 패이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비행기의 편대가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나타나서 빠르고 규칙적인 소리의 기총소사를 퍼부어대거나 두 줄기씩 빨간 불길을 뿜는 로켓 포탄을 쏘아대는 모습, 그리고 그 비행기 편대들을 향해서 쏘아올려지는 고사포탄의 아름다운 벗꽃 무늬 폭발운(爆發雲)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그림으로 그리곤 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탱크를 많이 그렸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중에는 차차 양 날개 끝에 럭비 공 모양으로 뾰죽하게 생긴 것을 매단 제트기를 더 많이 그렸다. 제트기의 주위에는 고사포탄의 그 아름다운 벗꽃 무늬 폭발운도 빼놓지 않고 그려넣었다. 어느 날엔가 본, 폭탄 파편에 맞아 머리에서부터 피가 줄줄 흐르는 계집애를 업고 가는 남자 어른도 그렸다. 나보다 얼마 크지도 않은, 중학생 또래의 앳된 군인이 총을 길바닥에 끌다시피 메고 가는 모습도 그렸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역시 제트기를 그리는 일과 그 주위에 벗꽃 무늬 모양 또는 목화송이 모양의 그 대공포 폭발운을 그려넣는 일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빼고 대부분의 시간은, 나는 안집 대청마루에 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으로 보내었다. 여러 가구의 세들어 사는 집 아이들 모두가 그곳에 와서 놀았다. 그곳이 가장 넓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안집 어른들을 포함해서 낮에는 모든 어른들이 집에 없었다. 아버지는, '동란'이 시작되고나서 얼마 동안 자전거같은 걸 타고 시골로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가 언제부터인가 전의 동회 사무실 자리에 생긴 무슨 '인민위원회'인가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 때 난 아버지를 따라 어느 날 동회 사무실에 갔다가 '소년단'이라는 명칭에 매혹되어 '인민소년단'인가에 기쁘게 가입했으나 별로 소집도 하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장사하던 그루터기를 모아가지고 골목 밖 한길 모퉁이에서 조그만 좌판 장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낮 동안은 나 혼자 남았는데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내가 어울려 놀던 아이들 가운데 두 명의 여자애가 지금도 기억난다. 하나는 그냥 내 또래 계집애였고 또 하나는 내가 계집애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커서 누나라고 불러야 했다. 내 또래 계집애 이야기부터 해보자. 이 계집애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그 때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후로도 지속적으로 내 관심을 끈 일이었으니까.
그 날은 안집 대청마루에 그 계집애와 나 둘 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바깥으로 놀러나간 모양이었다. 햇빛이 환한 한낮이었다. 계집애가 나에게 말했다.
" 우리, 안방에 들어가서 놀래?"
내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다. 난 그 때 이미 어떤 설레는 예감 때문에 반 쯤 겁먹고 반 쯤 당황하기 시작했으니까. 계집애가 침착하게 나를 이끌었다. 넓은 안방엔 역시 아무도 없었고 창호지를 투과한 햇빛만이 조용히 방 안을 지키고있었다. 계집애가 나를 이끌고 방 한 쪽, 이부자리가 개어져 높이 쌓여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나를 맞은편에 앉히고 자기는 이불 더미에 기대 앉았다.
" 넌 우리 엄마랑 아버지가 밤에 뭐하는지 모르지? 내가 가르쳐줘?"
계집애가 천연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알 것도 같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꼭 안다고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해봐..."
계집애는 옷을 벗었다. 나는 계집애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계집애는 나에게도 옷을 벗으라고 했다. 나는 내가 어떤 옷을 벗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계집애의 발가벗은 몸은 놀라웠다. 맨 가슴에 보일락말락 살짝 도드라진 부분이 있었고 다리 사이에는 내가 가장 관심을 많이 갖고있는 부분이 보였다. 그것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계집애는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자세를 바꾸었다.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세워서 벌리고, 머리를 이불 더미에 기대 누웠다. 나는 내가 보고 싶어했던 것을 자세히 보았다. 나의 비뇨기가 딱딱해졌다. 딱딱해진 나의 비뇨기를 자세히 바라보던 계집애가 말했다.
" 이리 와봐..."
나는 계집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만져봐"
계집애가 다시 말했다. 나는 내가 만져보고 싶었던 것을 만져보았다. 아주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 이렇게 해봐..."
계집애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며 다시 말했고 나는 계집애의 지시에 따랐다. 계집애는 나의 비뇨기를 자신의 따뜻하고 예쁜 성기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계집애가 시도하려는 일은 잘 성사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비뇨기에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피하고 싶은 고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계집애는 참을성있게 몇 번 더 시도하였다. 계집애와 나의 몸에선 땀이 났다. 그러나 계집애가 시도하려던 일은 끝내 성공되지 않았다.
안방에서 나왔을 때 계집애는 분하다는 듯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 내일 다시 해보자... 내일, 딴 애들 없을 때 이리 와. 그리고 이건 너하고 나하고만 비밀이다"
계집애와 나는 두 번 쯤 더 만났다. 그러나 계집애가 시도하려던 일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 번은 안방의 다락에 올라가서 다락문을 닫은 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계집애네가 멀리 이사를 갔기 때문에 나는 계집애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내가 계집애를 더 만나고 싶어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누나라고 부른 여자애는 중학생이었는데 내게는 아주 커보여서 거의 어른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들 중에서 키도 큰 편이었다. 얼굴이 약간 길고 마른 편이었으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 누나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자기는 '이승만'편이라고 공공연히 아이들 앞에서 말했다. 우리는 그 무렵, 며칠 동안인가 학교에 소집되어 낯선 선생들한테서 '원수와 더불어...'로 시작되거나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되는 노래들을 배운 끝에,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이며 매국노라고 배운 바 있었으므로 그 누나의 말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감명을 주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주장을, 그렇게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는 건 보통의 아이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정치적 반역이 주는 매력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낀 것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누나는 내게, 최초로 어떤 정치적 감정을 맛보게 해주었다. 항상 '우리 편'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다른 편'이 '좋은 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 누나는 우리와는 달리 보다 많은 진실과 더 많은 비밀을 알고있는 것같이 여겨졌으며 아주 용감해 보였다. 자기 오빠는 국군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으며( 고자질 할 테면 해봐, 하는 표정이 여유있게 떠올라 있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다시 서울로 반격해올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그 때는 빨갱이들은 모두 혼이 나게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한 편 아버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와서는 전에없이 무슨 책인지 열심히 읽어대는 아버지, 사람들 앞에서 연설도 한다는 아버지, 무엇엔지 몹시 불안해하는 할머니에게 " 염려 마세요. 세상이 이제 달라졌어요"라고 말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아무래도 그 누나가 말하는, 그것도 아주 깎아내려서 말하는 빨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그 누나가 모든 걸 다 알고있는 것 같이 여겨져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누나는 말했다. 미국은 어마어마하게 힘센 나라이며 인민군 따위는 문제도 안될 뿐더러 원자폭탄도 갖고있어서 소련도 문제가 아니다, 그 미국이 '이승만박사'와 국군을 돕고있다, 매일같이 수백 대씩 날아오는 비행기들이 저게 다 미국 비행기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서 모두 도망쳐버릴 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인민군이 언제나 여기 있을 줄 알고 날뛰던 빨갱이들은 모두 총살을 당하고 말거다, 라고.
그  얘기를 들은 뒤론, 나는 그 누나를 마음 속으로 존경하면서도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곤 했다. 왠지 그 누나는 '좋은 편' 그리고 나는 '나쁜 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누나가 말하던 사태는 정말 왔다.
시간이 갈수록 그 누나가 말한 '미국 비행기'들의 폭격은 더욱 사나워졌고 우리가 '쌕쌕이'라고 부르던, 양 날개 끝이 럭비공 모양으로 생긴 제트기 말고도 나중에 우리가 '제비'라고 부르게 되는, 더 재빠르고 더 날렵하게 생긴 제트기들도 공중에 나타났다. '제비' 역시 두 줄기씩 빨간 불을 뿜는 로켓포탄을 쏘아댔다. 한 번은 할머니가 장사하는 좌판 근처에 가서 놀다가 그 '제비'가 바로 할머니와 나의 머리 위에서 로켓포를 쏘는 바람에 꼭 죽는 줄만 알았다. 할머니는 아주 재빠른 동작으로 나를 덮쳐서 근처의 담벼락으로 밀어부치고는 '제비'의 공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자신의 몸으로 내 몸을 감싸덮고 있었는데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 재빨리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할머니의 몸에 갇혀서 담벼락에 바짝 붙어있던 그 시간이 내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중앙청(우리는 총독부라고 불렀다)이 폭격을 맞았다. 그것은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중앙청은 '미국 비행기'들의 마지막 공격 목표가 되리라고 우리는 듣고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청의 둥근 '돔' 부분이 시커멓게 그을리고, 부상 당한 수많은 '인민군'들이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꾸역꾸역 줄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약간 겁먹은 기분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시 얼마 안가서 우리는 굉장히 크고 기분나쁜 휘파람 소리들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대포들에서 쏘아진 포탄이 바람을 가르면서 내는 소리라는 것이었는데 그 휘파람 소리들이 들릴 때마다 우리는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장독대 밑에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 숨곤 했다. 그 휘파람 소리들의 위력에 비하면 장독대 밑 지하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안전한 장소로는 여겨지지 않았으나 피할만한 곳이라곤 그 곳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인가 그 휘파람 소리들을 듣고난  어느 날, 우리는 멀리 바라보이는 남산 꼭대기에 수많은 군인들이 개미떼처럼 아물아물 늘어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국군'들이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우리는 골목 밖 큰 길에서 '국군'들과 미군들을 보았다.
그들은 서대문 쪽에서 광화문 네거리 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는데 미군들 중에는 얼굴 빛이 새카만 군인들도 있었다. 껌을 씹고있는 군인도 있었다. 내가 미군들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태극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쳤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같았기 때문이다. '국군'들의 모습에 관한 뚜렷한 기억은 없다. 아마도 미군들의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게 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향해 더러 손을 흔들기도 했다. 키가 큰 그들은 팔도 길고 손도 큰 것같았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낮잠을 자고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 때 이미 마음의 준비가 얼마간 되어있었지 않나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 어떻게 낮잠을 잘 수가 있었겠는가. 내가 집에 돌아온 지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열린 대문(여러 가구가 세들어 살기 때문에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으로 총을 가진 사람들 너댓 명이 우르르 들어섰다.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그저 보통 옷에 무슨 완장만 팔에 두른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불문곡직 아버지가 자고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마당에 서있던 할머니와 나는 잠시 어쩔 줄 모르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열어젖혀진 방 안에서 아버지가 눈을 뜨고 말없이 일어나 앉는 모습이 보였다. 무례한 방문자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아무런 항의의 빛도 나타나있지 않았다. 그들 중 하나가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면서 말했다.
" 나와!"
아버지는 천천히 일어나서 말없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은 아버지를 대문 쪽으로 돌려세운 뒤 총부리로 아버지의 등을 밀었다.
" 이 빨갱이새끼!"
할머니가 절망에 찬 표정으로 그들에게 매달렸다.
" 아이구, 다 모르고 한 짓이라우. 한 번만 용서해주. 내가 이렇게 빌 테니 한 번만 용서해주"
그러나 그들은 거칠게 할머니를 뿌리치고는 계속 아버지의 등을 총부리로 밀어댔다. 아버지는 말없이, 방금 잠에서 깬 사람답지 않게 허둥대는 빛도 없이 대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때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 애비가 어디루 가는 지 좇아가 알구 올 테니 꼼짝 말구 집에 있거라. 갔다 와서 저녁 밥 해주마. 어디 가지 말구 꼭 집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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