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널 스코어 - 0
따스한 날이다. 때 이른 더위도 물러가고 도시의 콘크리트를 소리 없이 적시던 비도 그쳤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초여름의 맑은 날이다. 파란 하늘은 경계가 희미한 옅은 구름들에게 번져 연한 하늘색으로 스며들고 조심스런 숨소리를 낸다. 하늘을 향해 가득 피어난 나무의 새파란 손바닥들이 바람에 산들거린다. 아침 새들이 창 바로 앞 전깃줄에 앉아 하루를 헤쳐 나갈 연약한 깃털을 고른다. 아이들이 저마다 큰 가방을 하나씩 짊어지고 학교에 간다. 무심히 야채와 과일들의 이름을 외치는 행상트럭 앞을 지나면서 아이들이 귀를 막는다. 짧아진 옷 밖으로 보송보송한 맨살이 아침 햇살에 투명하게 빛난다. 사내 녀석 하나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연신 눈을 비빈다.
김선일씨가 살해됐다. 지난 6월 23일 새벽, 정부는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가나무역 김선일(33)씨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잃었다. 보도를 접한 국민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할 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어떻게 발음하고 문장으로 만들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고, 그래서 말을, 언어를 잃었다. 그 마음들을 비슷하게라도 담아낼 관용적 표현조차 없었다. 비었다. 마음속에 들어있던 것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다가 뒤섞이고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사람들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마음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끔씩 검은 바람이 갈라진 목소리로 서투른 외국어를 웅얼거리며 지나갈 뿐이었다. 이번 주 파이널 스코어는 0이다. ‘없음’이다. 김선일씨를 잃은 국민들의 마음이다.
김선일씨는 나쁜 사람이었다. 김선일씨를 직접 만난 적도 없고 간접적으로라도 알지 못하지만, 뻔하다. 그리 길지 않았던 생애 동안 못된 짓들을 밥 먹듯이 했을 것이다. 섣부른 오만으로 가득 차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형제자매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고, 모든 일을 자기 편한 대로 합리화하고 친구를 속이고 동료들의 기대를 저버렸을 것이고, 애인이 있었다면 애인마저 배신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모든 일이 그들을 위해서였다고 변명하고 잠깐의 반성이나 기도로 용서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들 중에 가장 나쁜 것은 그의 죽음이다. 그는 살아 돌아왔어야 한다. 자신을 납치한 무장단원들에게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이라크 죄수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 심한 치욕과 고문을 받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살아 돌아왔어야 한다. 살아 돌아왔어야 한다. 무장단원들에게 어떤 사기를 쳐서라도, 어떤 감언이설로 꼬드겨서라도, 속죄의 대가로 손가락 한 마디쯤을 잘라주고서라도 살아왔어야 한다. 그의 죽음은 부모의, 형제자매의, 친구와 동료들의, 애인의, 온 국민의 간절한 바램을 제멋대로 저버리고, 그도 모자라 그 모든 사람들의 언어마저, 마음마저 뺏어 가버렸고,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그는 정말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다. 김선일씨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죽게 내버려뒀다. 생명은 중요하다. 생명은 중요하다. 그를 죽게 내버려뒀다. 그러고도 모자라 어리석게도 복수하고픈 생각이 들고, 그의 죽음을 이용해 우리의 이익을 합리화해서 선전하고픈 생각이 들고, 아예 아무 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처럼, 다 잊은 것처럼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두고픈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김선일씨는 어리석은 전쟁에서 어리석게 죽었다. 숨겨진 의혹과 밝혀야 할 진상이 있다면 명명백백하게 밝혀야겠지만 더 이상 어리석음을 반복해선 안 된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르고, 전쟁은 전쟁을 부른다. 우리가 관용의 고통을 대가로 그 비극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어리석은 일들을 당장 끝내야 한다.
아이들도 행상트럭도 가버리고 골목은 텅 비었다. 부드러운 햇볕만이 아스팔트를 지그시 누르고 따뜻하게 덥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말이 필요 없는 세상, 눈빛만으로, 마음만으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따스한 세상에서 편히 쉬시게, 착한 사람아... *
|
관련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