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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스코어 - 19
올해 여름은 정말 덥다. 기온도 높지만 몸으로 직접 느껴지는 더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한낮에 거리로 나서면 뜨거운 공기에 숨이 턱 막히고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햇빛에 눈을 뜨기도 힘들다. 조금 걸어볼라치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팔다리가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다. 한편, 지난 달 말부터는 주로 필리핀 해역에 산다는 고래상어가 국내 해안에 출현, 화제가 됐다.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열대지방이 되려나보다. 그럼 우리나라에 열대우림이 생기는 걸까? 그럼 오랑우탄들이 우리나라에 살려고 헤엄쳐 올까?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필자가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모양이다.
올해 여름이 덥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침체된 경제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원유 가격은 날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이라크로 간 한국 젊은이들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불안하기만 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하시는 분들은 유유자적(?)하시며 ‘정체성’이 어떠니 하는 철학적(?) 논쟁이나 하고 자빠져(?) 계시고, 창의적인(?) 중국 사람들은 모든 나라들이 자기나라의 속국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렇게 국민들 가슴에 열불이 나는 일들밖에 없으니 더 더울 수밖에.
지난 8월 12일,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여자를 흥분시키는(?) 특효약이라며 ‘액상 마약’(GHB)과 수면제 판매광고를 낸 뒤 1천5백만 원을 받아 챙긴 김모씨(25)를 사기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또 김씨에게 속아 가짜 ‘물뽕’(물에 탄 형태의 히로뽕)을 구입한 증권사 직원 정모씨(31) 등 19명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벌금 2백만 원씩에 약식 기소했다. 이번 주 파이널 스코어는 이 사람들의 숫자, 19다. 단위는 명.
이 사람들, 생각해볼수록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들이다. 사기꾼 김씨에서 속아 제품(?)을 구입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이면서 실제로 히로뽕을 얻지는 못했지만 ‘히로뽕인 줄 알고’ 구입했다는 점 때문에 범법자다. 정씨를 비롯한 문제 있는(?) 남자들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여자가 GBH를 마시면 30분 안에 흥분하고 만사 OK'라는 코믹한(?) 광고에 속아 제품을 구입했다고 하니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고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쯪쯪... 한심한 사람들. 그 돈으로 밥이나 한 끼 더 사주고 선물이나 하나 더 사주지. 그런데 이 남자들에게 실제로 배달된 것은 렌즈 세척제였다고 한다. ‘지저분한 눈 닦고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번 사건이 재미있는 점은 이처럼 피해자와 범죄자의 경계, 나아가 선과 악의 경계를 과감히(?) 무너뜨린 포스트모던(?)하고 해체주의적(?) 사건이라는 점이다. 사기꾼 김씨도 참 뭐라 쉽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사기를 쳤으니 나쁜 사람이지만 한심한 사람들을 곯려주고 생명을 살리기까지 했다. 자살을 할 목적으로 그 제품을 구입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사기를 당한 덕분에’ 귀중한 생명을 건진 것이다. 이모씨(26·여)는 부모의 이혼과 취업난 때문에 자살할 목적으로 수면제를 대량 구입했지만 실제 배달된 것은 칼슘 보충제였다. 평소 빚 독촉에 시달려온 박모씨(45)도 사기꾼 농간 덕(?)에 목숨을 건졌다. 한꺼번에 50~100정의 칼슘제제를 먹은 이들은 검찰 조사에서 “죽으려다 뼈만 튼튼해졌다” “2번 살게 해줘 고맙다”는 말을 김씨에게 남겼다고 한다. 아, 정말 사기꾼 김씨는 이 시대의 의로운(?) 사기꾼이 아닐까?
왜 이렇게 ‘시시껍절’한 얘기를 파이널 스코어와 같은 권위 있는 지면에서 하고 있는지 의아해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 뭘 쓸까 고민이 많았다. 경제 얘길 쓸까, 유가 상승 얘길 쓸까, 중국 역사왜곡 얘길 쓸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후텁지근한 얘길 써서 안 그래도 더운 독자들을 더 덥게 만들 수는 없었다. 덥고 짜증나더라도 웃으면서 살자. 이번 ‘가짜물뽕사건’처럼 웃기는(?) 일도 벌어지는 게 세상 아닌가? 이제 곧 더위도 물러갈 테고 우린 웃으며 지나온 여름을, 그 무지막지했던 더위와 어려움과 난관을, 바나나를 놓고 벌였던 오랑우탄과의 결투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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