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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니컬 시네마>
명상의 공간, 명상을 시작하는 에너지
텅 빈 하늘, 천천히 미끄러지는 구름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은 누구의 것일까? 노란색과 갈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을 통과해 얼굴에 스며드는 가을날의 햇빛에서 느껴지는 행복은 누구의 것일까? 늦은 오후, 해를 등지고 선 사람들의 뺨에서, 보송보송하게 빛나는 솜털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누구의 것일까? 그렇게 무수한 이미지들을 보고 들으며 우리는 의식하기도 하고 의식하지 못하기도 하는 감정들을 느끼고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 일들은 다시 기쁨을 주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며 기억되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은 묵묵히 우리들을 통과한다. 햇빛이 나뭇잎을 통과하듯.
<엘리펀트>는 미국 콜럼바인고등학교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감독, 거스 반 산트는 사건의 본질을 정의하고 원인과 해결방법을 찾기보다는 대체로 ‘그대로 보여주기’의 방식을 택한다.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한다. 정보를 전달하는 주된 방식으로 ‘롱테이크’(long take)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그 증거다.
롱테이크는 말 그대로 쇼트들을 잘게 이어 붙여서 장면을 구성하지 않고 편집 없이 한 번에 촬영된 것을 길게 보여주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이 <엘리펀트>에 쓰인 이유는 객관적인 시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영화작가는 관객들에게 특정한 장면에서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그럴 때 영화적 기법이 동원되며 그 기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편집이다. 롱테이크만으로 장면을 구성하는 것은 그런 ‘작가적 개입’을 하지 않고 관객들로 하여금 사건을 관찰하게 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엘리펀트>에서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을 번갈아 따라다니며 그들이 벌이는 일을 묵묵히 보여줄 뿐 특별히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총기난사사건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왕따문제, 신체적 콤플렉스, 폭력적인 컴퓨터게임, 왜곡된 가치관, 총기관리문제 등도 롱테이크 중간에 아무런 강조점 없이 그저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다.
실외와 실내를 거침없이 드나드는 자유분방한 롱테이크가 가능했던 것은 학교건물의 건축적 구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자연광과 인공조명은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의 눈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특정한 화학반응을 만들어내는 물질일 뿐인 필름에는 각각 전혀 다른 색조로 재현된다. 빛의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광용과 실내조명용 필름이 구분돼있다. 실내가 완전히 인공조명인 상태였다면 <엘리펀트>의 제작진은 실내외를 드나드는 롱테이크 자체를 포기하거나 학교 안의 모든 조명을 태양광선의 파장을 내는 특수한 촬영용 조명으로 바꿔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학교 안 곳곳에 햇빛이 충분히 들어오는 큰 창문과 통로가 있어서 따로 특수 조명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얼핏 생각하면 한 번에 찍을 수 있으니 편할 것 같지만 사실 롱테이크는 촬영스태프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기법이다. 시작에서 끝까지 단 한 번의 작은 실수도 없이 연기, 카메라 조작, 녹음 등이 모두 성공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한 사전 연습이 필요하다. 더구나 <엘리펀트>에서처럼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 계속 이동하는 경우, 카메라감독은 배경과 등장인물의 변화에 따라 위치를 잡고 한시도 피사체에서 초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집중해야 하고, 조수는 카메라를 졸졸 따라다니며 시시각각 바뀌는 빛의 양에 따라 미리 측정해놓은 수치로 노출량을 바꿔줘야 하며, 마이크, 녹음기 등을 조작하는 사람들도 동선에 따라 장비를 들고 이동해야 한다. 사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롱테이크 기법 자체에 있다. 편집 없이 장면이 이어지므로 자칫하면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엘리펀트>의 감독과 촬영스태프는 어려운 롱테이크를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프레임을 드나드는 인물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미장센(장면의 종합적인 구도)과 일탈적인 기법사용(이 부분은 뒤에서 설명하겠다)을 통해 긴장감 있고 미적으로도 훌륭한 비주얼을 만들어냈다. 베토벤의 ‘비창’이 깔리는 운동장 장면은 특히 아름다운 롱테이크들 중 하나다.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작가는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과는 달리 주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롱테이크로 구성된 시간들은 겹치기도 하고 순서가 뒤바뀌기도 한다. 나중에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하는 알렉스와 에릭의 교실장면과 집안장면은 앞선 다른 장면들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있었던 사건이다. 복도에서 일라이스가 존의 사진을 찍고 미쉘이 가로질러 뛰어가는 장면은 세 아이들을 따라가며 세 번 반복된다. 여기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왜 작가는 이렇게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만든 것일까?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롱테이크 속에 돌출적으로 사용된 일탈적인 기법들을 보면 이런 의문은 더욱 커진다.
일탈적인 기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돌출적인 슬로우모션이다. 운동장에서 미쉘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뒤에서 아이들이 미식축구를 킥오프할 때, 친구의 개가 존에게 뛰어오를 때, 네이단이 지나가자 수다를 떨던 여자아이가 하나가 “진짜 귀엽다”고 말할 때, 일상적인 속도로 보여지던 화면은 돌연 슬로우모션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정상 속도로 돌아온다. 이런 장면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체 테이크를 고속촬영(슬로우모션 효과)으로 찍고 정상속도 부분에서 남는 프레임을 덜어내든가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해 슬로우모션 부분의 모자라는 프레임을 그려 넣어야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전자의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다른 한 가지 일탈적인 기법은 자의식을 가진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가끔씩 카메라는 보고 싶은 것들을 보면서 두리번거린다. 카메라는 교장에서 시작해 존을 거쳐 존의 뒤에서 움직이는 아이를 따라 팬, 네이단과 캐리를 따라가다 선생들을 보여준다. 치어리더 세 명이 식당에서 음식을 받는 장면도 비슷하다. 영화의 처음, 중간, 끝에 등장,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텅 빈 하늘도 상당히 주관적인 요소다. 이런 기법과 장면은 재배치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롱테이크가 가진 객관성을 훼손하는 이질적이고 모호하고 주관적인 것들이며, 관객들을 객관성에서 벗어나 그것을 나름대로 이해하려 애쓰게 만든다. ‘불균일성’이 관객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닌가? 작가는 왜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주관적인 요소들을 섞어놓은 것일까?
<엘리펀트>를 통해 작가가 관객에게 원하는 것은 사건을 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이 아닌 것 같다. 거스 반 산트가 원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 즉 사건에 대한 ‘명상’이 아닐까.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은 완전히 객관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언어화되기 이전의 어떤 주관적인 느낌과 에너지가 존재하는, 모호하고도 신비한 내적 공간이다. 또 명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의지, 에너지가 필요하다. 관객들이 총기난사사건에 대해 총체적으로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편견과 가치판단을 떠나있는 텅 빈 하늘같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명상을 시작하게끔 하는 느낌과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작가는 전체적으로는 냉정하리만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 태도에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작은 생채기, 또는 상처들을 만들어놓은 건 아닐까. 분명 <엘리펀트>는 뭔가를 느끼게 하고 어떤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모호하고도 신비한 힘으로 우리의 느낌과 생각이 진실 자체나 전체가 아니라 ‘코끼리의 다리 한 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을 깨닫기 훨씬 전에, <엘리펀트>는 우리의 눈에 펄떡펄떡 뛰는 ‘빛의 아름다움’을 던져준다. 그 아름다움은 영화예술만이 줄 수 있는 것이고, 놀랍게도 우리에게 영화 속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말해준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눈이 시리게 맑은 햇살의 아름다움, 그 햇살을 반쯤은 머금고 반쯤은 반사해내는 ‘살아있는’ 아이들의 아름다움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이들의 마음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을 걱정, 우울, 분노, 외로움, 콤플렉스, 기쁨, 행복, 사랑이 그러하듯, 아이들의 얼굴 위에서 미세하게 바뀌어가는 색조, 그림자, 명암의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이 아름다움을 통과해가는 시간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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