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크니컬 시네마>
<연인>의 사랑에 대하여
A - 바람이에요. 어느덧 다시 가을이 오고, 온몸을 감싸는, 그리하여 세포들을 하나하나 서늘하게 일깨우는 바람이 불어요. 세상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져있는 저를 발견하게 하고, 이별을, 아픔을, 고통을,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간절히 원하게 하는 바람이에요.
B - 목마른 바람이죠. 당신도 저도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요. 이 바람 속에 서있으면 문득 당신과 제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 외로움, 쓸쓸함이 무엇을 원하는지, 마침내 사랑이 되는 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나오는지.
장이모우 감독의 신작 <연인>은 현란한 색의 잔치판이다. 특히 초반부 장쯔이의 무용씬은 눈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장면이다. 감독은 세트, 의상, 메이크업뿐 아니라 로케이션의 풍경까지를 종합적이고 정교하게 디자인해서 색들이 살아 숨쉬는 화면을 관객 앞에 펼쳐 보인다. 스크린 위에서 색들은 마치 영화 속 홍등가, 우윳빛 살결의 기생들처럼 때로는 몸을 비비고, 섞고, 때로는 저마다의 미모를 뽐내며 대립하면서, 깔깔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현란한 색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지만 전체적으로 <연인>의 영화적 완성도는 그리 높다고 볼 수 없다.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방식이 부실하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A - 알아요, 텅 빈 우리 마음속에서 불어나오고 있다는 걸.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란 뭐죠? 바람결에 실려 떠다니는 꽃씨인가요?
B -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아, 모르겠어요. (사이) 존재를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왜, 가끔씩 당신이, 제가 진짜 존재하는 건지, 혹시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무서워질 때가 있잖아요.
<연인>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슬로우모션과 음악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는 점이다. 슬로우모션은 주로 극적 긴장감을 높이거나 멋진 장면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느린 시간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므로 너무 자주 사용되면 영화의 현실감을 약화시킨다. 음악은 엄격히 얘기하자면 영화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보기 힘들다. 영상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의 이야기는 촬영과 편집 등의 영상언어로 쌓여 가는데, 음악은 주로 그 과정에서 특정한 감정을 증폭시키거나 그 감정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되는, 다분히 독립적인 요소다. 슬로우모션과 음악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관객들이 가진 일종의 영화적 훈련효과, 또는 관습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미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학습되고 훈련되어, 슬로우모션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뭔가 멋진 느낌을 받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슬픈 음악이 깔리기 시작하면 대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슬퍼진다는 것이다.
<연인>과 <영웅>은 제작단계에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각 분야의 최고들이 이 두 편의 영화를 위해 모였는데, 그 중심에 감독 장이모우와 제작자 빌 콩이 있다. 장이모우는 <붉은 수수밭> 등 완성도 높은 영화들로 중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사람이다. 빌 콩은 자신이 제작한 <와호장룡>이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도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자, 일약 아시아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제작자가 된 거물이다. 중화권 최대의 ‘큰손’과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이 만나 만든 <연인>과 <영웅> 프로젝트는 중국시장에서 영화를 산업으로 정착시키고 재생산구조를 만들려는 중국영화계의 첫 번째 본격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그럼 중국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이 만든 것은 어떤 영화일까?
A -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해요. 우리는 시간의 폭풍 앞에 한없이 작고 위태롭게 서있으니까.
B - 그러니까 자꾸만 확신할 수 없어지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는 이를 통해 확인하려 하는 것이고 그게 사랑 아닐까요? 거기에 도취되는 일 아닐까요? 그 욕망에 넋을 잃는 일 아닐까요?
장이모우는 우선, 무협장르를 선택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이모우의 무협영화는 기존의 홍콩무협영화와는 좀 다르다. 원래 무협영화에서는 인물들의 '무공'을 주된 볼거리로 삼는데, <연인>에서는 그렇지만은 않다. 장이모우는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무협'을 지향하는 것 같다. 무공이 극적으로 노출되는 결투장면들을 들여다보면 이해하기 쉽다. <연인>에서는 인물들의 무공이나 승부의 박진감보다 액션의 미학적 안무가 더 중요하다. 최고의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의상, 소품, 미술에 많은 정성을 들이고, 경치가 좋은 로케이션을 찾아 우크라이나까지 간 것도 ‘아름다운 무협’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멜로와의 결합이다. <영웅>에서도 그랬고 <연인>에서는 좀 더 전면적이다. 이것은 상업성을 고려한 선택인 것 같다. 더 이상 홍콩무협영화의 전성기 때처럼 마초판타지를 가진 남성관객만으로 수지를 맞추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고, 여성들이 좋아하는 사랑이야기를 가장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연인>에서 슬로우모션과 음악을 많이 사용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대중적 호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그 다음 이유는 장이모우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특징 자체 때문일 것이다. <연인>에서 슬로우모션은 주로 액션을 우아하고 멋지게 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됐다. 감독은 결투장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이소룡 영화의 긴장감이나 경외심이 아닌, 성룡 영화의 재미나 웃음도 아닌,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주려고 했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등장인물들이 애틋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음악으로 관객들의 느낌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그 느낌 역시 전체적으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고, 바로 그런 아름답고 우아한 무협, 아름답고 우아한 사랑에서 상업성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A - 만약 그렇다면 그 욕망이 순수해야 진짜 사랑이겠죠.
B - 하지만 그 욕망이 순수한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사람의 욕망은 모두 한 덩어리로 뒤엉켜 있잖아요. 뭘 보고 판단해야 하죠?
중화권에서 끌어 모을 수 있는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끌어 모아 자국시장을 개척하고자 했던 장이모우와 빌 콩의 야심 찬 시도는 과연 성공했을까?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연인>이 중국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는데도 그렇게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외국영화와 공정하게 경쟁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관객들에게 <연인>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사랑하라고 떠밀었다. 둘째,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중국인들은 <연인>을 사랑했지만, <연인>이 관객들에게 준 사랑, 즉 영화적 완성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이모우는 인물의 내면을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관객들의 마음이 스스로 보편적 사랑의 아름다움, 우아함에 가 닿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거나 못했고, 그 빈 자리를 관객들의 관습에 기댄 슬로우모션과 음악으로 채워 넣었다. 관객의 눈치를 보는 만큼, 관객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만큼, 영화는 점점 천박함에 가까워진다. 장이모우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토록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그가 모를 리 없다. 달리 생각해보면, 천박함을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영화라는 게 원래 천박한 장르 아닌가? 그럼으로써 생명력을 얻는 장르 아닌가? 결국 개인적 선택일 뿐인가? 아, 모르겠다.
A - 모르겠어요. (골똘히 생각하다 혼잣말)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닐 거야. 화려하고 예쁘게 보인다고 그게 진짜 사랑은 아닐 거야...
B - 보이는 걸 믿지 마세요. 사랑은...
그래도 마지막까지 중요한 건 작가의 관객에 대한 ‘진짜 사랑’이 아닐까? 작가는 관객들의 마음에 비친 모습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의미를 가지는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아무리 현란한 화면을, 현란한 테크닉을 보여준다고 해도 ‘진짜 사랑’이 없다면 사기 아닐까? 그 사기에 관객들이 항상 속아 넘어가기를 바라는 건 일종의 자기혐오가 아닐까?
A -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세요? *
|
관련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