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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니컬 시네마>
<21그램>의 편집에 대해
당신은 불행한가? 곧 행복이 당신의 겨드랑이를 간질일 것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곧 불행이 당신의 집 문을 부수고 쳐들어올 것이다. 당신은 절망에 빠져있는가? 곧 희망이 당신의 곪아터진 상처에서 연한 싹을 틔울 것이다. 당신은 희망에 가득 차있는가? 곧 절망이 무거운 쇠사슬로 당신을 칭칭 감을 것이다. 당신은 죄를 짓고 괴로워하고 있는가? 곧 구원의 은혜로운 햇살이 당신의 언 가슴을 녹일 것이다.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곧 가장 혐오스런 죄를 저지르고 당신의 가슴 속 가장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힐 것이다. 당신은 죽어있는가? 곧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할 것이다. 당신은 살아있는가? 곧 죽을 것이다.
<21그램>은 역동적인 감각의 데뷔작, <아모로스 페로스>로 널리 이름을 알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이하 이냐리투)의 두 번째 영화다.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 폴(숀 펜), 잭(베니치오 델 토로),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 이하 티나)를 따라가며,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과 상태들을 보여준다. 희망, 절망, 죄책감, 사랑, 증오, 복수심, 삶, 죽음 등이 그것들이다. 영화 속에서 그것들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인과 결과의 끈으로 단단히 연결되어있다. 한 가닥 희망은 어느 순간 천 길 나락의 절망으로 바뀌고 그 절망은 다시 희망의 씨앗이 된다. 삶은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을 낳는다. 그 모든 과정은 인간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운명, 신의 의지, 우연 중 무엇으로 불러도 좋을,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진행된다. 그 앞에서 폴의 수학, 잭의 종교, 티나의 가족과 같은 의미들은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형식의 측면에서 볼 때, <21그램>이 비범해 보이는 이유는 촬영과 편집에 있다. 개성 있는 색의 사용, 질감과 프레이밍(framing, 화면 안에 피사체를 담는 방법)을 통한 표현, 블리치 바이패스(bleach-bypass, 스킵 블리치 skip-bleach, 실버 리텐션 silver-retention, ENR도 같은 개념) 현상방법, 감각적인 들고찍기 등 촬영에 대해서도 얘깃거리가 많지만 이 글에서는 편집을 자세히 뜯어보려 한다. 편집이야말로 <21그램>을 <21그램>이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21그램>은 산만하고 무질서해 보인다. 세 명의 주인공을 각각 따로 쫓아가고 있는 데다, 사건의 순서마저 뒤섞어놓은 편집방식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부분이 되면 관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서 어떻게 됐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산만하고 무질서해 보이는데 왜 그런 일이 가능할까? 보이지 않는 어떤 질서가 있는 걸까? 아니면 인간의 신비한 두뇌활동이 각 부분들을 융합시켜 유기적으로 이해에 도달하게 하는 걸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씬들의 연결관계를 최대한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법 밖에 없다.
필자는 영화 속 모든 씬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이 씬들은 자연적 시간순서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A. 교통사고 이전 B. 사고와 그 직후 C. 사고 후 바뀐 세 사람의 운명 D. 폴과 티나의 결합, 잭의 방황 E. 복수와 결말이 그것들이다. 먼저 A부터 E까지 각각 다른 색깔의 펜으로 표시를 했다. 그리고 나서 전체 씬리스트를 펼쳐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예상했던 대로 한 가지 질서가 발견됐다. 그 질서의 영향으로 씬리스트는 전체적으로, 놀랍게도 자연적 시간의 순서대로 A-B-C-D-E의 흐름을, 전통적인 분류법으로는 기(A, B)-승(C)-전(D)-결(E)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위가 가장 작은, ‘기’의 두 번째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이 부분을 구성하는 씬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잭의 생일파티를 위해 잭의 집에 모인 친구들(B) - 남편의 메시지를 듣고 행복해하다 병원에서 전화를 받고 쇼크를 받는 티나(A+B) - 사고현장을 둘러보는 잭의 부인과 목사(B) - 병원에서 인공수정에 대해 의사와 상담하는 폴과 아내(A) - 가족들이 실려온 병원에 온 티나(B) -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집에 도착하는 잭(B) - 피 흘리는 폴을 태우고 차를 달리는 잭과 티나(E) - 수술 후 심장 기증자에 대해 궁금해 하는 폴(C) - 의사의 말을 듣고 우는 티나(B) - 집 마당에서 괴로워하는 잭(B) - 수영장에서 티나를 훔쳐보는 폴(D) - 전 직장에서 짐을 챙겨 나오다 매니저와 대화하는 잭(A+B) - 병원에서 장기기증 의사를 질문 받는 티나(B) - 자다가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전화를 받는 폴(B) - 수술 받는 폴(B). 다시 각 씬들이 포함되는 부분들의 기호들만 나열해보면, B - (A+B) - B - A - B - B - E - C - B - B - D - (A+B) - B - B - B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A에 해당되는 씬이 세 개, B는 열한 개, C는 한 개, D는 한 개, E는 한 개다. B에 해당되는 씬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B의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이 부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같은 식이다. 따라서, 영화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A의 분위기 - B의 분위기 - C의 분위기 - D의 분위기 - E의 분위기 순서로 진행된다. 조각들을 뒤섞어 놓으면서도 그 조각들을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에 어느 정도 모아놓은 것이다. 이처럼 <21그램>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일정한 질서에 따라 편집됐고, 그 질서를 통해 관객들은 어느 정도 시간과 사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감독 이냐리투는 전작 <아모로스 페로스>에서, 편집감독 스티븐 미리온은 <트래픽>에서 이미 복잡한 편집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고, <21그램>에서는 솜씨가 더욱 정교해졌다. 그럼 이런 스타일의 편집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무엇일까? 우선,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궁금증을 유발한다. 시간적으로 뒤에 일어난 사건들이 불쑥불쑥 등장, 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됐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관객들은 중간 정도의 지점과 맨 끝에 가서야 풀리는 두 가지 큰 의문, ‘세 사람의 운명을 바꾼 사고는 무엇인가’와 ‘모텔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에 대해 궁금해 하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이냐리투 영화에서는 두 번째 효과가 더 중요한데, 그것은 관객들에게 사건과 사건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사건을 자연적 시간에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고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영화가 진행된다면 관객들은 세 사람의 운명과 감정의 흐름을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갈 것이다. 앞부분을 조금씩 잊어가면서(!).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예를 들어, 행복한 순간 바로 다음에 불행한 순간을 붙여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삶의 총체적 본질을 한눈에 바라보게 한다. 그 총체적 인식의 순간은 극적이고 폭발적이다. 씬 단위에서 몽타주 효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편집 방법의 단점도 있다. 가장 큰 단점은 물론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방법이 아니라는 점이고, 그 다음이 바로 영화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21그램>은 이 단점을 연속성을 중시하는 씬 연결방법으로 보완했다. 음악을 이용한 방법, 움직임에서 움직임으로 연결하는 방법도 많이 쓰였지만, 특히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된 것은 사운드를 활용한 방법이다. 큰 소리(대사, 배경음향, 음향효과 등)와 함께 새로운 장면을 시작해서 자칫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연결부분으로 관객의 감각이 가지 않게 했다.
진정 <21그램>이 의미 있는 영화인 이유는 사실 촬영이나 편집에 있지 않다. 세 주연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영화 속 희망이, 절망이, 사랑이 관객들의 가슴에 절절하게 가 닿을 수 있었을까? 영화를 대하는, 삶을 대하는 작가의 겸손함과 진지함, 진심이 없었다면 촬영과 편집에서의 현란한 기술들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21그램>은 그렇게 열정적이고 진지한 장인들의 땀 냄새가 배어있는, ‘삶에 관한’ 영화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아무리 애써도 마음먹은 대로 살아갈 수 없는, 그래서 언제나 다가올 일들에 대해 가슴 졸이게 되는, 아름답고 비루하며 신비하고 두려운, 인간의 삶에 대한 영화다. <21그램>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굴레, 인간의 조건을 아프게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어떤 자세로 이 아름답고 비루하며 신비하고 두려운 삶을 맞닥뜨릴 것인가? 살면서 끝까지 놓치지 않고 붙들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온갖 의미의 찰랑이는 푸른색 액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존재의 내면은 사실 물 빠진 수영장처럼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으로 그 텅 빈 공간을 채울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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