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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니컬 시네마>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시네마노보의 서사방식
“...그의 가축들은 정신없이 새끼를 쳤다. 계속되는 잔치 때문에 수많은 소와 돼지와 닭들이 끊임없이 도살을 당했으며, 앞마당의 흙은 잡아먹힌 가축들이 흘린 피로 검은빛이 되었고, 언제나 질퍽질퍽했다. 뼈다귀와 창자들이 마당에 잔뜩 쌓이고, 쓰레기가 진흙구렁텅이에 범벅이 되어서, 그들은 몰려드는 말똥가리새들이 손님들에게 달려들어 눈알을 쪼아대지 못하게 하려고 쉴 새 없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야만 했다...”
- G.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중에서.
세계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를 좀 더 올바르고 평등하게 바꾸려는 열정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때가 있었다. 그 열정은, 때로는 작은 열매를 맺기도 했지만 대부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가뭄에 말라죽어버리거나 불모의 땅에 떨어져 잊혀지거나 조각조각 찢긴 채 쓰레기더미와 함께 불태워졌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물처럼 맘껏 누리고 있어서 자주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곤 하는 자유와 평등은 그 사람들의 말라죽어버리거나 잊혀지거나 불태워진 열정 위에서 피어난 것이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남미대륙을 여행하며, 그런 순수한 열정에 눈떠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라틴아메리카는 풍요와 다산(多産), 축제와 광란의 땅이다. 이런 원시적 생명력은 이질적인 것들의 뒤섞임에서 왔다. 인종적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토착 인디오, 스페인과 포르투갈인, 흑인, 각국에서 온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공존하며, 이들 사이에서 복잡한 혼혈이 이뤄졌다. 라틴아메리카는 억압과 착취, 슬픔과 고통의 땅이다.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온 식민통치와 독재정치, 그로 인한 불평등한 사회구조 때문에 대부분의 남미사람은 눈물과 고독의 세월을 살아야했다. 이런 인종적, 역사적 배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다양하며 힘차고 기름진 문화적 토양을 만들어냈다. 그 기름진 토양은 열대식물들처럼 형형색색의 꽃들을 활짝 피워냈다. 그 꽃들 중 하나가 위에서 인용해놓은 것처럼 놀랄 만큼 역동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이다. 브라질의 ‘시네마노보(Cinema Novo, 새로운 영화라는 뜻)’로 대표되는 진보적 민족영화들도 그 찬란한 꽃들 중 하나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 영화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일방적인 정치적 선전이 아니라 삶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주제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둘째는 전체적으로 체 게바라를 ‘위인’이 아니라 평범하고 순수한 청년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길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길에 대한 애정’으로 치자면 브라질 출신의 감독 월터 살레스도 이들 못지않다. 따뜻한 로드무비 <중앙역>도 그가 만든 것이다. <중앙역>이 유럽 비평가들에게 주목받은 이유는 이 영화가 브라질의 시네마노보 영화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역에서 편지 대필을 하는 중년여자와 고아소년이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중앙역>은 여러 모로 그럴 만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 속에 그려진 하층민들의 ‘굶주림’(여기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그로 인한 일탈적 가치관과 행동, 신비한 종교적 체험 뿐 아니라, 영화의 배경이 되는 브라질의 황량한 북동부 지방이 바로 <검은 신, 흰 악마> <황폐한 삶> 등 시네마노보 걸작들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역>은 시네마노보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어떨까?
체 게바라가 친구와 함께 남미대륙을 여행하고 있을 즈음, 이미 도스 산토스를 비롯한 의식있는 브라질 영화인들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영화를 위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었다. 60년대에 본격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글라우베르 로샤의 <검은 신, 흰 악마> 도스 산토스의 <황폐한 삶> 루이 게라의 <총> 등이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그려냈다. 글라우베르 로샤는 시네마노보 감독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로샤는 탁월한 이론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시네마노보의 방향을 ‘굶주림의 미학’이라는 말로 정의했다. 브라질 사회의 본질을 ‘굶주림’이라고 파악하고, 그 굶주림을 표현하기 위해 굶주림에서 파생되는 도둑질, 폭력, 살인 등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네마노보 영화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필자는, <검은 신, 흰 악마>와 같은 걸작들이 로샤의 글로 정리된 ‘선언’적 의미를 뛰어넘어, 만든 이들조차 완전히 알아채지 못한 풍요로움을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그 풍요로움은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다양성과 자유분방함에서 온 것이다. 특히 영화의 서사방식(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시네마노보의 감독들은 서구의 직선적 서사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민중기독교, 샤머니즘, 전통음악, 전통춤, 신화, 전설, 민담의 이야기구조 등 브라질의 다양한 민중문화(그것은 태생적으로 건강하고 풍요로우며 진보적이다)를 가져와 서사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시네마노보 영화들은 소비에트영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영화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의 리얼리즘 영화와도 확연히 구분되며, 정치적 의식뿐 아니라 원시적 생명력과 삶의 입체성까지 담아냈다.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아쉬움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할리우드식 직선적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여행의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의 모든 부분들이 ‘체 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단일한 목표 속에 배치되어있다. 이런 할리우드식 서사,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출발한 서구적 서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서구적 서사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딱딱하고 차갑다. 단지 수많은 서사방식들 중 하나일 뿐인 서구적 서사가 영화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해버린 현실은 할리우드영화의 세계지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중앙역>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 속엔 브라질 민중기독교의 신비체험 등 시네마노보의 장점들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혁명가를 직접 다루는 정치적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중앙역>에서 한 걸음 정도 뒷걸음질친 영화다. 특히 이별파티장면에서 체 게바라의 ‘할리우드식 감동적인(?) 연설’과 영웅적인 강 건너기로 인위적 클라이맥스를 만든 방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이 영화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견해와는 무관하게 민담 같은 환상적 서사를 만들어낸 월터 리마 감독의 <바람의 전설>(1997)이 좀 더 시네마노보를 계승하고 있는 진보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감독 월터 살레스는, 물론 시네마노보 영화들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자신의 영화를 시네마노보와 연결시켜 보려는 비평가들의 태도가 부담스러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네마노보의 유산들은 그가 짊어져야할 ‘십자가’라기보다는, 그가 계승하고 발전시켜야할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보물이다. 시네마노보의 서사는 부드럽고 뜨겁다.
지금까지 말해온 문제의식은 한국영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관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어떻게 풍요로운 서사를 만들 것인지, 어떻게 영화에 다양성과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전통문화의 요소들을 몇 가지 끼워 넣는다고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그 전통문화의 요소가 ‘현재 살아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자학적 오리엔탈리즘으로 비판받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어느 시대에나 있고, 누구라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든, 사회이든, 영화이든,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세계를 향한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정열만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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