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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에 읽은 신문 칼럼인데,
혼자 읽고 지나치기에는 아까워서 옮겨두었습니다.
무쇠탈 사회
- 문국현(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
한겨레 2004. 6. 16
<무쇠탈>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버스 안에서 깡패들이 한 무고한 시민을 집단 폭행하는데도 ‘무쇠탈’을 쓴 듯 외면하던 승객들이, 한 사람의 용기에 힘입어 시민정신을 되찾고, 폭력배들에게 대항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시민정신이 제법 살아 있는 듯 보이다가도, 교통질서나 유흥ㆍ음주문화 등을 보면 실망스러워진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가 정말 ‘무쇠탈’을 쓰고 있구나 하고 크게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직장의 과로 문화를 접할 때다.
통계를 보면, 지난 2002년의 직장 산업재해 피해자가 8만2천명을 넘고, 그 중 2600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개인은 물론 그 가족이 일생 겪어야 할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로 인한 경제 손실이 10조원을 넘는다니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할 과제였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2003년 실적을 보면 더욱 참담한 생각이 든다. 산업재해 사망자가 줄기는커녕 3천명을 넘어서고, 산업 재해자가 9만명을 넘어섰으며, 그 경제 손실이 12조원을 넘어섰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불행과 낭비의 밑바닥에는 우리 사회 지도층들의 사회적 책임감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지도층들이 일반 시민들이 직장에서 얼마나 과로하는지, 얼마나 재해를 당하고, 얼마나 죽어가는지 뼈저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로 시간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선진국에 비해 뒤떨어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 선진국들의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할 때는 우리도 선진국처럼 살아보자는 꿈과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OECD 국가 중 태반의 유럽 국가들이 주 평균 32시간, 연평균 1600시간 안팎을 일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다는 미국이나 일본도 주 평균 36시간, 연평균 1800시간 내외를 근무하면서, 세계 최고, 세계 최대 경제대국의 위치를 계속 강화해 나가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 사회는 지금도 평균 주당 48시간, 연간 2400시간 내외를 일하고 있다. OECD 국가들에 비해 50% 가까이 더 과로하는 이 문화가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극심하게 위협하고,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깨뜨리고, 그 자녀들에게 불행과 가난을 세습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이 문제에 일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법에서도 이미 주당 40시간 근로 원칙을 정해놓고 있으며, 노사정 합의에 의해 유예기간을 거쳐 다음달 1일부터는 금융기관, 공기업, 1000명 이상 근무 대기업부터 주 40시간 근무제를 우선 실시하기로 했다. 새로운 정책에 모범이 되어야 할 공무원들도 내년부터는 이 법정근로시간을 지켜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시한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 사회의 준비 태세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노동자만 놓고 보더라도, 주당 48시간 안팎 장시간 노동자가 아직도 800만명이 넘고, 주당 56시간을 넘는 초장시간 불법 노동자가 300만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이런 불법적인 작업 관행이 일부 중소기업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무심한 소치다. 지성인들과 엘리트들의 직장이라는 상당수 금융기관이나 언론·방송기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국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야 할 경찰서, 소방서, 그리고 복지시설 등 국가기관에서마저, 주당 56시간을 넘어 심지어 72시간까지 근무하는 불법적 근무 형태가 작은 정부 추구라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아직도 사라질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법과 비인간적 작업 관행이야말로 국민의 건강을 해치고, 가정을 파괴하고, 평생학습의 기회와 발전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는 대표적 폭력이건만, 우리 사회의 각계 지도층과 유수한 비판 그룹들은 아직도 ‘무쇠탈’을 쓴 채 못 본 척, 외면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이들이 나약함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저 무심한 ‘무쇠탈’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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