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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10-22 20:38:01 / Hit:2486  

자리잡고 문안 인사드립니다.

선생님께.

1.
요즘엔 밤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납니다. 아침 식사 시간이 여덟 시, 점심이 열두 시, 저녁은 다섯 시 이십분입니다. ‘하루 세끼는 꼭 챙겨먹자!’ 는 저의 좌우명에 따라 밥을 챙겨 먹다보니 어느새 밤에 잠들고 새벽에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거의 군대에 다시 온 기분입니다. 만날 정오에 일어나서 두 시 쯤부터 하루를 시작하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니, 하루가 엄청 깁니다. 심심해 죽겠는데 말입니다.

2.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봉화라는 곳에서 조금 더 산골로 들어가야 있는 애당이라는 곳입니다. 춘양이라는 소읍과 서벽이라는 소읍의 중간쯤 되는데 서벽은 김기덕 고향이랍니다. 예전에 김기덕이 한 인터뷰에서 나는 벽촌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다고 한 말이 기억나는데, 그게 겸양으로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여기는 누가 더 깡촌인가 대회 같은 거 하면 어디에도 결코 밀리지 않을 곳입니다. 세상에 슈퍼라는 곳에서 캔 맥주를 안팝니다. “여기서 캔 맥주 누가 먹어? 양도 쬐그만 해가지구.” 아줌마가 저를 보고 그럽디다. 얼마 전에 ‘봉화 소식’인가(이 동네의 지역 신문인가 봅니다.)에서 보니 김기덕이 자기가 졸업한 초등학교에 와서 “대충하면 대충 산다.”고 연설하고 갔다고 써져 있길래 여기가 김기덕 고향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3.
심심해서 친구들을 몇 명 사귀었습니다. 한 놈은 ‘숭그리’ 라는 이름을 가진 송아지고(뭐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한 놈은 졸리라는 이름을 가진 시베리안 허스키 강아지입니다.(역시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얼마 전까진 젤리였는데 이 놈이 영 딴청을 피워서 졸리로 바꿨습니다.) 봉화에는 소가 유명하다던데 정말 소들이 깨끗합니다. 왜 보통 시골 소들은 엉덩짝에 똥 덩어리 같은 것도 붙어 있고 냄새도 많이 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근데 여기 소는 목욕이라도 시키는지 아주 깨끗합니다. 특히 제 친구 숭그리는 깨끗하기도 하거니와 눈망울이 서글서글한 게 엄청 귀엽습니다. 하는 짓이 귀여워서 뭘 좀 먹이고 싶은데 도시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어떤 풀을 먹여야 될지 몰라 난감해하곤 합니다. 잘못해서 독초라도 먹여가지고 남의 집 송아지 죽어버리면 아주 난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가끔은 식당에서 버리는 배춧잎을 들고 가서 먹입니다. 송아지 입에서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나는 게 아주 신기합니다.
졸리는 마을버스 정거장에 묶여 있는 강아지인데 시베리안 허스키입니다. 점심 먹고 산책 나갈 때마다 졸리에게 건빵을 주는데 이 놈이 아주 영리합니다. 지금까지 ‘앉아’ ‘일어서’ ‘들어가’(졸리 집으로) ‘나와’(졸리 집에서)를 가르쳤는데 말을 잘 들을 때마다 건빵을 하나 씩 줍니다. 건빵을 던지면 날렵하게 풀쩍 뛰어올라 건빵을 받아먹으려 하는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보통은 건빵이 입으로 안 들어가고 콧등에 텅 부딪혀서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먹습니다. 어떤 때는 콧등으로 너무 세게 쳐내서 개 줄이 안 닺는 곳에 건빵을 떨어트리고는 끙끙거리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 저는 건빵을 다시 주워서 졸리에게 주면서 “아이구 등신아 너는 하는 짓이 어쩌면 나랑 똑같냐.” 뭐 그럽니다. 저는 졸리랑 하루에 20분 정도 노는데 한 번은 식육 식당 아줌마가(졸리의 진짜 주인입니다.) 식당 문을 열고 나오더니 한참동안 저를 한심한 듯 쳐다보다가 그러는 겁니다.
“아저씨, 아저씨가 그 개 가져가요. 아저씨가 자꾸 건빵 주니까 개가 밥을 안 먹잖아요.”
저는 그 말이 진짜 개를 가져가라는 건지, 건빵을 주지 말라는 건지, 자기 개를 이제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건지 뭐가 뭔지 몰라서 그냥 민망스러운 건빵 봉지를 움켜쥐고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고 황급히 고시원으로 돌아왔습니다.

4.
산 하나만 넘으면 동해도 보인다고 하던데 그게 해발 1600 미터짜리 태백산이라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소설만 씁니다. 남들은 다 고시 공부하는데 혼자 돌아다니기도 민망하고 그래서 방구석에 처박혀서 툭탁툭탁 소설을 씁니다. 사실 굉장히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고 대충 합니다. 식당 아줌마가 저보고 항상 밥 먹으러 제일 일찍 온다며 밥 때만 기다리냐해서 민망했습니다. 사실 몇 자 쓰고 밥 먹으려면 두 시간 30분 남았군, 또 몇 자 쓰고 밥 먹으려면 아직도 두 시간 15분 남았군. 뭐 이러긴 합니다.
그래도 조금 심심해서 그렇지, 아주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도 강도 둥굴둥굴해서 오랜만에 마음이 차분하고 유순해진 듯도 합니다. 

1월이나 되어야 올라갈 수 있을 듯합니다. 그때가 되면 당구실력이 예전 같지 않을 거 같아 걱정입니다.
그럼 선생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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