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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열망-실망의 사이클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출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가 노무현정부 100일을 맞이하여, 정부수립이후 현재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신정부가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앞으로의 국정운영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필자의 일차적인 목적은 신정부의 리더십스타일이나 정책방향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검토나 평가를 하기보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보다 깊고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제시해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87년 민주화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퇴락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만약 퇴락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고 대안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해보려 한다. 노무현정부가 한국사회발전과 민주주의를 위해 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면 그 내용은 한국민주주의를 깊고 넓게 이해하는 방법을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본 章의 주제, 나아가 이 글 전체의 주제는 열망-실망의 사이클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Politics by other means)이다. 전자는 선거과정에서 투표자들을 통하여 분출된 열망이 선거이후 즉 새로운 정부의 수립이후에는 실망으로 변하는 주기적 순환을 말하는 것이다. 후자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이 열망-실망 사이클의 악순환의 결과이자 때로는 원인으로서 혹은 그와 수반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열망-실망의 사이클은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통하여 하나의 법칙적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정도로 그간 민주정부들이 보여주는 패턴이 되다시피 했다. 노무현정부는 앞선 민주정부가 직면해야 했던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노무현정부뿐 아니라 한국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제기되어야 할 핵심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망"이라는 말은 스페인어의 "데이센칸토"(desencanto)의 번역어인데, 이는 외국어에서 온 것인 만큼 신생민주화과정에서의 하나의 일반적 현상이라는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실망이라는 말이 그에 앞서 그 실망의 강도만큼 강한 열망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왜 그러한가? 한국에서 그것은 민주화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경로로 이루어질 수 있었나 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체제와 그 아래에서의 산업화를 통하여 기틀을 잡았고, 그 결과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보수적 리더십과 헤게모니가 주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두루 아는 바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이런 조건에서 발생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제도화된 영역 밖의 힘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른 바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경로를 따르게 되었다. 제도권 밖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운동의 성격은 이념적으로 급진적이며 이상주의적, 낭만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민주주의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정당(체제)의 低발전이 그러한 현상을 결과했다는 것이다. 냉전반공주의 이념의 헤게모니적 영향 하에서 정당의 이념적 기반은 매우 협애했고, 리더십은 허약했으며, 오랜 권위주의하에서 야당은 특히나 빈약한 인적-물적 자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화는 운동이 중심이 된 거리의 정치로부터 선거경쟁의 場으로 정치의 중심을 이동시키면서, 운동이 정치의 전면에서 후퇴하게 된 반면 정당이 그 중심행위자가 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운동이 "후보단일화", "비판적지지", "독자후보" 등으로 분열된 것은, 운동세력들이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었던 상황의 제약을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화 과정에서 협력했던 두 세력 즉 운동세력과 야당 사이의 괴리와 긴장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야당은 이러한 조건 위에서 집권하게 되었다. 집권정당이 되고, 정부가 된 이들 야당은 커다란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다음의 세 가지가 특히 중요한데, 새 정부의 집권자들은 이 세 가지 문제로 인하여 집권하는 것보다 집권이후에 그들을 선출해준 투표자의 요구에 부응하여 정부를 잘 운영하는 문제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① 리더십과 인적자원의 문제:
허약한 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인적자원의 큰 부족과 아울러 정부운영에 대한 見習경험(apprenticeship)을 갖지 못한 것이 가져오는 정부운영의 미숙함,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김영삼정부의 수립에서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선거경쟁에서 이들은 개혁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의 집권은 그 자체가 보수적 기득층과, 변화에 대한 강한 요구를 갖는 민주화세력간의 격렬한 긴장과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개혁은 이들 정부가 아무리 합리적이고 능력있는 전문가/기술관료/학자들을 모아 정책프로그램을 잘 만든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은 힘의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있다는 것을 기본전제로 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혁슬로건이나 개혁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뒷받침할, 기득이익 못지않은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의 투입(input)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개혁의 과정에서 리더십은 흔들림이 없어야 하고, 비전, 프로그램이 체계적이고 현실성이 있어야 하며 이를 추진할 수단들이 정비되어야 한다. 즉 개혁은 정책적이기에 앞서 정치적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실제로 지난 민주정부의 경험은 정치적 뒷받침이 있을 때 개혁은 일정한 성과를 낳았고, 그렇지 않았을 때 좌절되었음을 보여준다.
② 헤게모니와의 대면과 타협:
집권이후의 시점에서 새로운 정부들은 보수적인 헤게모니와 타협하는 정황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두 가지 요인 때문에 그러한데, 하나는 새로이 집권한 민주정부 자체의 약함 때문이다. 인적자원 동원에 한계가 있고, 대안적 비전이나 개혁프로그램을 갖지 못하고 그로인하여 헤게모니적 이념이나 비전을 수용하면서 그 틀 안에서 개혁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강한 유혹을 받게 된다. 다른 하나는 사회의 사적 영역에서 강력한 기득이익들의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들 사적 기득이익들의 이념, 담론, 관점, 언어들은 언론을 통하여 대변된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논하기로 하겠다. 핵심만 먼저 말하자면 주체적으로는 기득이익을 능가하는 정치적 지지기반을 투입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강력한 헤게모니에 저항할 주체적 역량을 갖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이들은 현상유지를 결과하게 될 안일한 정책대안을 선택하려는 강한 경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새로운 정부들이 집권 초를 지나 현상유지적인 타협을 이루고, 선거경쟁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기여한 민주화세력과 강한 헤게모니를 갖는 기득이익 양자사이에 방황하면서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③ 한국판 分割정부의 출현:
한국의 헌정체제는 무엇보다도 미국헌법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과 국회라는 국민주권의 이원적 대표의 원리와 대통령, 의회, 사법부의 3권분립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화이후 한국정치도 제도적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유사한 상황과 문제를 대면하게 되었다. 미국은 1960년대 말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선거경쟁의 결과 대통령과 의회(상하양원)를 지배하는 정당이 다른 경우가 빈번해짐에 따라, 과거에는 예외적이었던 분할정부(divided government)적 상황에서의 정부운영이 일반적인 것이 되고 그 반대가 오히려 예외적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분할정부가 자주 정치의 교착상태(gridlock)를 만들어내면서, 대중동원을 목표로 한 정당간 선거경쟁으로부터 대통령 對 의회라는 제도적 권력 간의 쟁투가 정치의 중심이 되고 이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엄청나게 증대하게 되는 정치의 퇴락현상, 긴스버그와 세프터가 말하는 이른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Benjamin Ginsberg and Martin Shefter, Politics by Other Means: Politicians, Prosecutors, and the Press from Watergate to Whitewater, W.W. Norton & Company, 1999). 미국에서와 같이 1992년, 1996년 대선에서 집권당이 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클린턴정부와 1994년 총선에서 상하양원의 다수를 획득한 보수적인 공화당간의 쟁투, 다시말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이 행정부를 맡고 보수적인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한 경우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의 소수파정부 시기 개혁정책(또는 그 시도)에 대한 보수적 다수파인 야당의 도전과 견제는 한국에서도, 아니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정당과 선거가 중심이 되는 정치를 대체하고 있다. 제도적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제대로 작동할 때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역기능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출현은 민주주의의 퇴락을 말하는 징후적 현상이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민주당은 의회를, 공화당은 대통령직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민주당은 워터게이트나 이란콘트라사건에서 보듯이 언론의 준사법적 기능의 강화와 더불어 검찰의 수사라는 방법을 통하여 대통령직을 공격했고, 반대로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했을 때 화이트워터, 르윈스키사건에서 보듯이 더 격렬하게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정치인의 부패와 비리에 대한 언론의 폭로,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기소, 이 과정에서의 언론의 선정적 보도로 이어지는 이른바 "RIP"(Revelation, Investigation, Prosecution)가 정치의 중심이슈로 변했다. 미국의 경우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두 정당간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가 수렴되는 것과 함께 선거에서의 지지율의 차이가 줄어드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정치인들 간의 정권획득을 둘러싼 격렬한 쟁투가 결과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거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엄청나게 팽창하면서 사회저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대중동원의 메커니즘이라 할 정당의 역할이 줄어드는 현상을 동반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직접 투표자들에 대해 "책임성"(accountability)을 갖지 않는 제도나 기구들, 즉 국가기구내의 검찰이나 사적 영역에서의 언론이 점차 정치의 중심적 행위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김대중정부의 후반기는 "분권형대통령제"와 같이 대통령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제도개혁담론과 대통령주변과 정치인들의 부패를 둘러싼 이슈가 여론동원의 두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 연속선상에서 노무현정부의 임기 초기부터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가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 투표자의 다수동원을 목표로 했던 선거경쟁이 끝나고 난 이후 정치의 중심은 언론-검찰로 이동한 듯한 인상을 준다.
선거경쟁에서 다수를 획득하고 선출된 정부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정부안팎의 제약에 직면해왔다. 이러한 제약들은 민주정부들이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시민-투표자들의 개혁요구를 실현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결과는 민주화이후 한국사회가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심적인 과제들을 민주정부가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심적인 개혁과제란 이를 둘러싼 갈등의 영역, 갈등의 폭이 넓은 이슈를 말한다. 따라서 중요한 개혁은 그만큼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지지기반의 동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정치, 경제를 둘러싼 중심적 이슈들 바깥에 위치하는, 즉 갈등의 폭이 적고 기술관료적 접근이 가능한 이슈들, 예컨대 (탈)규제정책이나 행정합리화, 대민행정업무의 개선과 같은 문제들은 쉽게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필자는 외적 제약보다 내적 제약에 대해 더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선출된 정부가 비전, 정책목표, 정책의 실천프로그램에 대해 대안과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인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보수기득이익과 타협하고 그에 포획되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선출된 정부의 중심세력들이 투표자들의 다수로 표현된 요구를 개혁정책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결의와 노력보다 안일한 현상유지의 정책을 취하게 되는 정황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거과정에서 개혁적 후보로서 가졌던 자세와 입지는 집권이후, 그리고 정부운영에 점차 적응하면서 보수적 성향을 띠게 되는 유사한 궤적을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의 사례는 미국의 사례와 대비될 수 있을지 모른다. 미국의 정치학자들과 정치권의 상식은, 투표에 참여하는 미국의 유권자들은 대체로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클린턴 같은 후보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상대적으로 안정적 중산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보수적 자세를 취했고, 그래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된 이후 그는, 미국사회가 이루어내야 할 개혁의제들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자유주의적 개혁가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가 보인 정치적 태도의 핵심을 "클린턴은 보수적으로 선거캠페인을 했지만 진보적으로 통치했다(Clinton ran right but governed left)"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유권자들은 훨씬 개혁적인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이후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후보들이 모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민주적 개혁에 대한 열망은 강하고, 저소득층은 훨씬 저변이 넓은 반면, 한국사회의 지배적 엘리트층은 도덕성과 정당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한 이후 민주정부들은 매우 유사하게 보수선회로 돌아섰다. 그래서 우리는 클린턴의 예와는 달리, 한국의 대통령들은 선거경쟁에서는 개혁적이었지만 집권이후에는 보수적으로 통치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선거전과 선거이후의 이 격차는 선거과정에서 표출된 변화에 대한 열망이 결국 집권이후 실망으로 변하게 되는 원인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필자는 한국민주화의 가장 큰 특징을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한국정치, 한국민주주의에서 갖는 내용이랄까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핵심은 변화의 동력이 정치권 밖으로부터 투입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정치 밖에서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 바 열망의 강도이며 내용이다. 민주정치란 정치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정치를 통하여 공공선, 국가의 목표, 정책의 목표를 발견하고 콘센서스를 만들어가는 제도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대안을 조직한 정당들간의 경쟁과 타협을 통하여, 정치의 제도화된 영역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체제이다. 그런데 한국정치의 현실은 제도권 안의 정치행위자들이 대안을 만들어내고 실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도권 안의 정치과정에서 지배담론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존 정당 내 정치인들의 의식과 행태가 너무 많이 지배담론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망의 또다른 원천이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한번에 끝나고, 그 동력의 힘을 받은 제도권 내의 행위자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발전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그리고 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다. 운동이 정점일 때가 정치의 시작이 되어야할 터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정치의 頂点이 돼버리고 이후 정치는 쇠락하는 것이다. 즉 운동의 퇴조와 함께 정치는 이내 퇴조하고 만다. 그 결과 정치제도권에 대한 실망과 함께 다시 정치권 밖에서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가 분출하는 조건이 형성되고, 그 이후는 다시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가게 된다. 요약하면 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곧 "정당없는 민주화"의 다른 말인 것이다.
결국 무능력한 정당, 시대에 맞지 않는 정당,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정당이 민주화이후 정치의 중심적 행위자가 되면서 사회의 민주화요구를 수용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 안팎의 헤게모니적인 힘, 즉 안에서는 기술관료가 중심이 되고, 밖에서는 언론이 압도적 영향력을 갖게 되고 그 조건에서 민주주의가 시행되었다. 아니 시행되었다기보다 顚倒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헤게모니적 힘들이 민주주의를 주도하는 것은 일정한 비용 내지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것은 곧 脫정치화 (de-politicization), 정치의 폄하, 정치의 축소, 그리고 종국에는 脫민주주의화 (de-democratization)를 확대하는 효과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밖으로부터 변화에 대한 힘이 결집하게 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선거에서 다시 투표자들은 운동의 힘을 통해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민주정부를 만들어낸다. 새정부의 집권은 곧 불만의 누적으로 이어진다. 열망-실망의 악순환의 고리는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반복되는 악순환이 아니라 그 순환의 내용이 점점 더 나빠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나빠진다고 말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정치는 문제덩어리이기 때문에 정치를 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투표참여율의 지속적인 하락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순환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그것의 중심이라고 할 정당과 정치에 대한 일반대중의 기대가 줄게 되면서 현실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대안의 범위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Ⅱ. 정치의 다운사이징--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것들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국가부분의 축소와 민간부문 자율성의 증대와 더불어 사적 영역의 확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 언론, 지식사회 등 한국사회의 보수적 부문은 시장효율성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한국을 이끌어왔던 국가에 대하여 그것의 실패, 비효율성을 말하면서 공공부문에 대한 민간부문의 우위를 강조한다. 즉 이들에게 있어 민주화는 곧 시장자유화를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진보파들은 그동안 국가의 팽창이 권위주의를 가져오게 한 요인이라고 전제하면서 공공성과 시민사회, 그리고 비정부조직(NGO)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세계화, 민주화, 신자유주의, 시장효율성의 가치와 독트린이 지배적인 현대세계에서 바람직한 변화의 방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적영역이 확대되고, 시민사회가 확대되는 것이 곧 그동안 권위주의하에서 억제되었던 사회전체의 영향력의 확대, 일반대중들의 정치적 참여의 확대, 사회의 균열과 갈등이 광범하게 표출, 대변되는 정치적 대표체제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대중의 정치참여가 확대되고, 이들의 이니셔티브하에서 정치가 확대되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이 민주주의의 중심적 조직이랄까, 메커니즘이 곧 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정치참여 확대 없이 사적영역이 확대된다는 것은 사회의 거대사익집단들, 거대사적 조직과 기구들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정치의 민영화(privatization)를 의미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곧 정치의 영역에 있어서 거대사익을 강화하는 한편 공공영역의 축소를 수반하는 것이다. 정치는 다시 공영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사적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언론의 역할이 커지고 정치를 주도하고 압도하게 된 것이 민주화이후 나타난 변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은 지식인, 관료, 정치인, 국회의원, 대통령 모두를 대상으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아젠다를 설정하고 잘잘못을 평가하고 사회와 정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가치판단의 기준들을 제시하면서 정치교육과 사회화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정당중심의 정치가 약해지고 언론이 정치를 대신한다는 얘기는 사회의 광범한 저변층이나 중산층의 이익과 요구보다는 상층의 기득이익이 일면적으로 대변된다는 것이다. 정치과정의 순환구조를 두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시민/투표자-->투표-->정당-->선거로 선출된 정부-->사회/시민/투표자에 대한 "책임성"(accountability)이라는 순환의 고리를 상정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회/시민/투표자-->투표-->정당-->언론에 의해 주도되는 정당 혹은 언론을 통하여 제공되는 여론의 부침-->선출된 정부 그러나 언론의 영향 하에 있는 여론의 부침과 평가에 끌려 다니는 정부-->투표자에 대한 책임성의 약화라는 순환의 고리이다. 이 두 번째 의 사이클은 여러 사람들이 미디어크라시(mediacracy), 미디어민주주의(media democracy)라고 말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치가 잘못 돌아간다고 할 때 그 책임을 모두 언론에 전가하는 것은 사태의 일면만 본 것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왜냐하면 언론이 주도하는 정치는 정당정치의 실패의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민주주의가 잘 안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당의 저발전과 정치인들의 무책임에 돌려져야하기 때문이다. 민주화이후 정당은, 적어도 개혁적이고자 하는 정당은 새로운 유권자층과 사회저변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고, 변화에 대한 강렬한 요구를 제대로 실현할 수 없었으며, 선거경쟁에서 새로운 리더십, 새로운 비전과 대안을 조직할 능력도 제시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 언론의 정치지배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귀결인 측면도 있다. 운동은 근본적으로 열정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현실주의적 차원에서 조직되어야 할 이념, 비전, 체계적 대안마련의 능력을 갖추기 어렵다. 헤게모니의 영향하에서 사회운동, 시민운동, 시민사회 담론들은 대안적 이론과 비전을 제시하는데 한계를 보였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민주화 이후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지식층을 창출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관점과 비전은 자주 지배담론의 거울이미지와 같은 내용으로 나타났다.
민주화이후 어떤 일상의 담론들이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왔나?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사회통합의 담론이다. 통합을 강조하는 담론은 갈등, 분열을 부정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자, 반대로 통합은 사회와 정치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로 제시되면서 긍정적 의미를 띤다. 따라서 누군가가 통합을 말하지 않고 갈등이나 균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곧 분열주의자로 간주되기 쉽고 한국정치의 기본적 해법을 모르는 것으로 질타되기 쉽다. 우리는 이미 해방 후부터 이승만대통령이 말했던 것처럼 대동단결을 강조해왔다. 이러한 언표화나 담론과는 정반대로 한국사회는 균열이 더 깊어지고 갈등은 더 많아졌다.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한 한 사회는 갈등과 균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하며, 민주주의란 이러한 갈등과 균열을 표출하고 조직화한 정당들 간의 경쟁을 제도화한 것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정부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새정부가 직면한 갈등이 무엇인가를 먼저 정의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새정부가 해야 할 일의 방향과 범위가 정해져야 하고, 그에 따라 정책이 도출되는 것이다. 만약 통합이 새정부의 시작이고 출발이라면 정당은 왜 있고 민주주의, 선거는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그럴 경우 선거란 누가 대통령직을 맡는가를 결정하는 방법 이상일 수 없다. 정치의 최종적인 목표가 사회통합일 순 있지만 그것이 시작은 아닐 것이다. 통합이 정치의 시작이 되는 경우 차이, 갈등, 소외, 균열은 억압되고, 이들이 표출되거나 대변될 수 있는 사회적 기반들은 약화될 것이며 당연히 정당이 사회에 뿌리내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갈등과 균열의 존재를 확인하고 표출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들이 통합에 이르는 정치적 과정을 의미한다. 통합의 담론이 지배한다면 거기에는 누군가가 이미 공익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국가이익이 무엇인가를 교시하고 훈육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개의 약한 이익들이나 특수이익들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되지 않으면서 강력한 사익(집단)과 동등하게 자기소리를 갖는 것, 그리고 이들 간의 다원주의와 갈등과 공적 논의 속에서 국가이익에 대한 콘센서스를 발견해가는 절차를 발전시키는 것이 곧 민주주의인 것이다. 높은 도덕적 가치의 잣대로 정치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도덕주의담론도 민주주의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의 도덕화는 정치를 혐오하게 하는 무기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정치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잣대를 비약적으로 높이면서 부패문제를 정치의 중심에 놓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정치인들과 정치와 관련된 사건들이 언론에 등장하고 검찰에 기소되는 빈도는 민주화 이래 김대중정부의 후기로 오면서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노무현정부는 취임초기부터 대통령주변의 부패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선택적으로 대통령과 관련 있다싶은 부패혐의에 집중하는 언론과 야당의 공격, 국회의 제도적 권력과 결합된 특검제의 활용은 미국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번창함과 다를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정도가 훨씬 심하다. 권위주의체제는 사실상 정부가 부패네트워크의 정점에 있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정부에 비해 민주주의 정부에서 부패가 더 창궐한다고 보기 어렵고, 김대중정부 후기와 노무현정부 초기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부패가 더 많다고 할 증거도 없다. 많아진 것은 언론의 보도와 검찰기소의 빈도이며 야당의 정부공격, 즉 언론-검찰-보수적 야당의 연계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민주정부들이 부패문제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거나 혹은 이를 옹호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부패에 대한 도덕적 기준도 높아져야 하고 정부의 부패는 언론과 야당에 노출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덧붙여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공적 영역의 부패, 국가부문에서의 부패는 민주화와 그로인한 투명성의 증대로 인하여 사적영역에 비해 빠르게 개선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법의 지배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을 주요 정책적 내용으로 사적영역의 부패를 척결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패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부패를 인식하는 인과관계의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 역시 지적되어야 한다. 국가부분의 부패문제의 핵심은, 국가와 사적영역 사이에서 후원과 정치적 지지가 교환되는 관계를 통하여, 혹은 정부와 민간부문이 수혜와 지대추구로 연결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패를 구조적으로 축소하는 최선의 방법은 민주화이다. 부패 때문에 민주주의나 정치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 때문에 부패가 유지되고 만들어지는 측면이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 바 "부패담론"이 주도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창궐은 민주주의발전에 부정적 효과를 낳는데, 그것은 정치자체를 부패한 것으로 정치인을 부패한 집단으로 인식토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 때문이다. 정치는 썩은 것이라는 인식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 냉소주의와 무관심을 조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정치가 부정될 때 정치를 통하여 가능한 민주주의가 존립할 기반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부패담론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언론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집권여당과 운동권과 같은 개혁세력에게까지 깊숙이 수용됨으로써 일반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고 있다.
정치개혁의 내용을 둘러싼 정부안팎의 여러 논의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그 주체가 개혁적인 정부라 할 때 정치개혁의 제일의 주제는 사회/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적 참여와 대표성의 확대, 그리고 국가/정부의 측면에서는 책임성의 확대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정치개혁 논의에서 그 기준과 목표가, 반부패로 표징되는 도덕적 규범이나 정치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증진이라는 경제적 가치에 두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지배담론의 교육자로서 언론이 가장 좋아하는 아젠다임에 분명하다. 부패는 이념적으로 협애한 정치적 대표체제가 갖고 있는 독점시장구조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개혁자들이 본말을 거꾸로 인식한다고 할 때 처방 또한 전도될 수밖에 없다. 부패의 결과물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자금의 사용을 지나치게 규제하고 지구당을 폐지하고 정당과 후보자가 유권자와 만나는 접촉면을 축소하는 한편 선거과정에서 매스컴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대안이 자주 논의된다. 그것이 사회저변층 대중들에게서 정당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질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서 미국 역사에서 이른바 "진보주의시대"(1890년대-1910년대)에 있었던 정치개혁의 사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시기 개혁자들은 정치의 부패를 막고 정치효율성을 제고한다는 목표하에 반부패, 정치로부터 독립된 전문가들의 역할을 제고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정치머쉰(후원과 지지표를 교환하는 보스중심의 정치동원기구)의 폐지, 정당정치인-기업의 연계금지 강화, 정치인부패방지기준 강화, 투표자등록제도입 등 현재의 정치관련 입법의 중심내용은 이때 만들어졌다. 그 결과 행정관료체계는 현대화되었지만, 반대로 이민자, 소수인종, 노동자 등을 포함하는 사회저변층의 정치참여가 줄어들면서 투표율이 30% 가깝게 떨어지는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이 개혁의 결과로서 상층, 중산층중심의 정치라는 미국정치의 특징이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문기술주의, 전문기술합리성의 가치 또한 지배적 담론의 중심내용이다. 민주정부도 큰 사회를 움직이는 기구이고 국가 역시 거대조직의 하나라고 할 때 이를 운영함에 있어서 전문성, 기술합리성이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전문기술합리성은 민주적 가치에 우선하여 강조될 수 있고 이를 대체할 수도 있다. 사회나 조직의 운영원리로서 그것은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의 한 사람인 로버트 달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기 플라톤의 저서 {공화국}에서 이론화된 바 있는 이 전문기술주의를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이라고 보았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베르나르 마냉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공직선출의 추첨제와 순환제를 중심으로 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의 본질은 전문기술주의에 대한 거부라고 해석했다. 베버의 관료주의이론도 이러한 이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전문기술주의는 정치에 있어 "후견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며, 민주주의의 중우적 성격을 부정적으로 강조한다. 기술합리주의, 엘리트주의는 일체의 민중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 담론과 병행하여 진행된다. 언론은 언제나 포퓰리즘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중적 요소, 운동의 힘들이 제도정치권으로 투입될 때, 사회저변층의 새로운 유권자층이 투표에 대거 참여할 때, 사회저변층의 이익들이 조직되고 운동이나 시위의 형태로 자신의 이익을 요구할 때, 집권당과 정부가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경우 언론은 이를 즐겨 "인기영합적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해왔다. 전문기술주의는 현대의 발전한 과학적 지식,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조를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으며, 이들에 다수가 되는 다수결과 같은 원리를 통하여 해결하기도 어렵거니와, 민주주의는 갈등으로 분열되기 쉽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분열과 갈등에 끌려 다니는 동안 사회전체를 위해 중요한 문제, 미룰 수도 방치할 수도 없는 문제들은 산적해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큰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갖는다. 이러한 가치와 관점은, 우리사회가 학벌중심사회적 특성이 강하고, 考試라는 국가시험에 의한 공직자충원 방법과 박정희식 관료적 발전모델의 신화 등으로 인하여 쉽게 확산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이 정치에 대해 갖는 효과는 크다. 정치인은 전문성이 없고, 무식하고 부패하고 파당적이다. 그들은 사익추구에 몰두하고 부패한 집단인 것으로 인식된다. 전문기술주의는 파당적 이익에 영향받지 않고, 국가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전문가(집단)을 상정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 관한 한, 그것은 주류언론뿐만 아니라 이른바 개혁적인 언론의 중심적인 논조로 나타나기도 하다. 운동권조차도 이러한 지배적 가치의 영향 하에 있다. 정치인들의 자격에서도 전문가라는 평가가 중시되고, 정부의 인사 특히 국영기업, 공사 등 인사충원에 있어 자격요건으로 "정치인 배제, 전문가 중시"라는 기준이 자주 강조되듯이 전문성, 기술합리성의 가치는 정치적 가치보다 우선된다. 뿐만 아니라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 전문가주의가 수반하는 효율성의 가치는 민주적 결정이 아닌 전문가중심의 기술관료적 결정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그 어떤 지배담론보다도 강력한 것은 경제, 시장효율성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성장, 수출신장, 경제안정논리, 경제불안, 성장둔화, 무디스 신용평가 등을 소재로 한 언론의 강조로부터 우리는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회의 경제적 생활이 시장에 의존하는 한 시장효율성, 성장의 논리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논리가 사회전체의 지배논리가 될 수는 없다. 현대 사회학의 대부라 할 탈코트 파슨스는 "경제제국주의"라는 개념을 썼다.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더욱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세계화담론과 더불어 시장담론, 시장규범, 시장효율성, 시장가치는 사회전체에 대해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시장자유화, 정치적 자유는 신자유주의적 시장모델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시장우선의 가치에서 정치는 부정적인 것, 비효율적인 것, 낭비적인 것, 즉 온통 문제덩어리로 인식된다. 정치의 역할이 굳이 있다면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것, 기업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이기도 하다. 정치적 가치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가치는 시장모델을 응용하거나 그 메타포로서 언표화되고 사고된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CEO대통령"이 대통령리더십의 한 모델이자 대안으로서 제시된다. 시장경쟁에서의 이익창출과 이를 위한 효율성을 기본가치로 하는 기업운영의 논리가 사회적 갈등을 표출/대변하고 시민들의 안정과 복리증진을 기본가치로 하는 공적 결정의 논리를 대신하고, 공기구로서의 국가운영의 원리가 기업운영의 원리와 동일선상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의 역할의 소멸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위에서 말한 중요한 지배적 담론의 요소들은 상호연관 및 상승효과를 갖는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담론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은 정치의 다운사이징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정치영역은 축소될수록 좋으며 그 자리에 성장, 효율성의 가치가 거의 맹목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을 뜻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감,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정치무관심, 냉소주의, 이 모든 것들은 투표율저락과 함께 탈정치화, 대중의 탈동원화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탈민주주의화에 이르게 될 것이다.
Ⅲ. 민주주의발전을 위한 과제들
앞에서 필자는 민주화이후 민주정부들이 대면하게 되는 가장 특징적인 현상으로서 열망-실망의 악순환 사이클과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퇴락하고 그 기반이 약화되었는가를 지배적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노무현정부는 어떻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하고 민주주의의 퇴락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기본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앞서 문제를 지적할 때 상당부분 논의되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하나는 정당개혁과 관련된 제도적 방안이며, 나머지 두 문제는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다.
정치개혁은 정당개혁이 핵심이며, 정치와 대중사회가 소통하도록 해야 하며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되살리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정당들이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에서 경쟁하는 동안 사회의 저변층, 소외층, 민주화이후의 새로운 젊은 세대의 유권자층은 대변되지 못했다.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한 이들의 강력한 요구가 정당의 정책과 이념으로 실현된 것도 아니다. 정당은 선거경쟁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노무현후보가 새로운 젊은 세대 유권자층의 지지를 많이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정당이라는 조직과 이들 유권자층의 조직적 연계를 통하여 안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유동하는 국면적 상황의 산물이었고, 양자간의 관계와 그 성격은 아직 정의되지 않고 느슨하다. 이들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과 새정부가 비전과 정책목표, 정책프로그램들을 통하여, 즉 대안의 설정을 통하여 그들의 정치적 성격을 구체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 새로운 사회적 힘은 정치적으로 정의되지도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새정부는 참여의 폭을 넓히고 사회의 요구를 폭넓게 대표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새정부의 개혁자들이 논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정치개혁의 목표를 지역주의극복/반부패에 둔다면 그것은 방향설정을 잘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정치엘리트내의 지역적 분포만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부패 문제에 관련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가 문제가 있다고 정치를 없애려는 접근은 올바른 대안이라고 할 수 없다. 보수양당체제와 엘리트카르텔이 유지되는 범위안에서의 변화는 정치개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치개혁의 목표는 정당(체제)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회요구로부터 괴리된 정당체제를 개혁하여 정치와 대중사회가 소통하는 것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이 설정되면 여러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대안의 방향을 설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의 헌정구조는 국가전체의 수장이자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강력한 권한과 권력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전형적인 대통령제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리더십을 통해 적은 사회적 비용으로 바람직한 변화와 개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제도적 장점을 갖는다. 그만큼 좋은 리더십을 가질 경우 실현할 수 있는 가능의 영역이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레이파트가 지적하듯이 그것이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과 같은 불확정적인 요소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단점도 갖는다. 그만큼 위험성 또한 크다. 정당정치 일반이 그러하듯 지지자와 당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의 역할과 선거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정부로서의 정당의 역할사이에는 일정한 긴장과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前者의 역할이 정당의 이름이 유래한 "부분으로서의 대변자", 즉 사회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한 부분(part),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이라면, 後者의 역할은 전체(whole)의 이익, 즉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가를 관리해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에서 하나의 정당은 한편으로서는 다른 정당에 대한 경쟁의 당사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집권시 국가의 관리자로서 이중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兩者사이의 긴장은 의회다수당이 정부가 되는 의회중심제보다 한 정당을 대표하지만 전국의 투표자들이 선출한 대통령제에서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민주화이후 선출된 정부가 선거과정과 선거이후 집권 시의 정책의 성격과 태도가 다르다고 말했고, 그것은 대체로 집권 전 개혁적인 것에서부터 집권 후 보수적인 것으로의 선회를 특징으로 하며, 이러한 태도변화는 열망-실망 사이클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문제는 부분의 대표자로서, 즉 한 정당의 대표로서의 역할로부터 집권 후 파당적 경쟁을 넘어서는 전체의 대변자로서 역할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이후 한국의 대통령들에게서 우리는 한 특징을 발견한다. 다음의 두 가지가 그것인데, ① 선거와 더불어 대통령이 될 때 그는 한 정당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그 역할을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다. ② 갈등을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이를 민주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지배담론의 영향 내지는 효과라고 본다. ①을 본다면, 강조되어야 할 것은 兩者 사이의 역할에서 핵심은 그가 정당의 대표라는 사실이다. 투표자들은 선거경쟁에서 그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정책, 이념,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의 후보이기 때문에 다른 정당후보가 아닌 그를 지지한 것이다. 때문에 선출된 대통령은 일차적으로 그를 지지한 투표자들이 그를 선출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위임(mandate)했기 때문에 지지자들에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언론을 중심으로 한 지배담론의 여론몰이는 그가 갈등을 부추기고 파당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대표가 아닌, 통합과 화합을 실현하는 국가전체의 대표가 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그는 기득이익과 타협하는 계기를 가지며, 결과적으로 정당의 대표가 아닌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역할을 취한다. 말하자면 선거 때는 표를 끌어들이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들의 지지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정당은 위임과 책임을 연결시키는 연계의 고리역할을 갖고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정당이 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대통령은 정당의 지도자이자 국가의 수장이라는 兩者의 역할 모두가 필요하다는 인식과 아울러, 양자택일적 선택이 아닌 양자사이의 균형을 적절하게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리더십이란 兩者사이의 적절한 균형, 적절한 배합을 이루어내는 능력을 말하며, 이 능력은 정당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투표자가 대표에게 하는 위임과 선출된 대표가 투표자에게 지는 책임성 사이에는 지도자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정한 자율의 공간이 존재한다. 그가 환경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면서 이 양자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추는가 하는 것, 이것이 대통령리더십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②의 갈등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본다면, 이는 ①보다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대통령의 결단력과 비전과 관련된 문제이다. 과거 대통령들은 언론의 평가와 여론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의식했다. 보수기득이익들과 갈등관계로 고통을 받기보다 그들을 만족시키려는 시도를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대통령자신을 위하여 그리 만족스런 것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그러한 태도는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정치개혁의 방향은 요컨대 사회와 소통하는 정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와의 소통에 있어 중심적 수단, 중심적 메카니즘은 정당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당의 활성화가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이 된다. 그런데 이 사회와 소통하는 정치의 활성화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민주적 정치과정은 특정의 사회적 균열이 지배적이라는 규범적 전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규정적으로 말하기 어렵고, 대중들이 정치에 폭넓게 참여하는 민주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는 콘센서스에 의해서만이 공익, 국가이익 내지는 정책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대중들의 참여로부터 시작하여 정책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는 이 전체적 과정에서 대통령의 리더십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이 상상력이 대통령의 머리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대중의 요구표출과 지식인들의 이론화 노력이 정당의 대표기능과 상호소통하면서 만들어지고 습득되는 사회적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은 이를 정치적으로 응집하여 정책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럼으로 정책형성과 결정은, 여러 전문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테크노크라틱한 결정일 수는 없고, 이어서도 안된다. 민주화이후 대통령주변에 그리고 정책결정이 일어나는 정부의 부처주변에 정책자문을 위한 위원회들의 설치가 꾸준히 증가해왔다. 이 시점에서 이들 정책자문기구들의 역할이 지식인전문가들이 갖는 전문지식의 투입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회의 요구와 사회적 지식이 투입되고 있느냐에 대해 자문해 보는 것은 의미 있다. 언제나 집권초기 새정부는 의욕과 개혁의지에 넘쳐 무언가 앞선 정부와의 차이와 업적을 만들어내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에서 만들어지는 정책결정은 전문가들의 투입이 중심이 되는, 또는 관료체제 안에서만 순환되는 내부투입(within-put)에 대체로 중심이 두어졌다. 핵심은 국가영역 밖의 사회로부터의 투입(input)이다. 우리가 정책결정이 정치 내지는 정치로부터의 투입과 결합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행정부의 고위결정자들이나 전문가들이 만드는 산출(output)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며 사회의 광범한 요구들이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와 정책의 결합이 그것이다. 이 양자를 결합시키는 능력이 바로 정치적 상상력이 뒷받침된 대통령 리더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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