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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장 스트리트
1.
비가 내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목조 건물들이 우두커니 비에 젖는다. 아무도 빨래를 거둬들이지 않아서 골목에 줄줄이 늘어선 빨랫줄의 옷가지들은 장례식 행렬처럼 쓸쓸해 보인다. 나는 창문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머리 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마치 거대한 안개가 들어앉은 것처럼 무겁고 흐릿해서 어떤 생각도 오랫동안 할 수가 없다. 주먹으로 머리를 쿵쿵 때려본다. 안개가 좀처럼 머리 속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 야구 방망이 같은 걸로 머리를 실컷 얻어터지고 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 머리가 이 모양이 된 것은 아마 두통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럴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두통약을 먹고 두통약을 먹으면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계속 그것이 반복된다.
골목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웨이터와 술집 아가씨, 밴드와 삐끼와 건달들이 모여 사는 이 골목에선 아침에 잠드는 사람은 있어도 아침에 일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 도시의 곳곳에서 사람들은 출근을 한다고 법석을 떨고 있겠지만 이 골목은 아직도 한밤중이다. 그렇지만 나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캔맥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골목을 바라본다.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요즘엔 좀처럼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 한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고 골아 떨어져도 몇 시간만 지나면 어김없이 눈을 뜨고 만다. 잠이 부족해서 피곤하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는 아니다. 나는 원래 잠이 별로 없다.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눈을 뜨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정말 엿 같은 일이다.
나는 골목에 덩그러니 있는 우울한 쓰레기통을 보고 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쓰레기통은 더 우울해 보인다. 내가 우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울한 쓰레기통은 골목에 있는 공동 쓰레기통의 별명이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울한 쓰레기통은 정말 그럴듯한 이름이다. 그 통 속에 들어있는 쓰레기들을 뒤져본다면 내가 왜 우울한 쓰레기통이 정말 그럴듯한 이름이라고 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실은 우울한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를 한참동안이나 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발톱을 세워 검은 비닐 봉지를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뭘 찾고 있는 것일까? 만약에 먹을 것을 찾고 있다면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거다. 우울한 쓰레기통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곤 일회용 주사기와 생리대, 약봉지들, 콘돔, 화장품 케이스 그리고 찢어진 팬티뿐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런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고양이는 누군가 자신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챈다. 영민한 동물이다. 고양이가 문득 나를 바라본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경계심으로 가득 찬 고양이의 눈. 이것만은 빼앗길 수 없다는 듯한 깡마른 눈. 저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어디서 보았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입술을 조그맣게 오물거려서 고양이에게 말을 건넨다. 걱정마라. 너의 쓰레기를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나는 필요 없으니까 그 쓰레기들이 필요하다면 네가 다 가져가라.
바람이 불자 목조 건물이 합창하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태풍이라도 불어서 이 골목의 모든 목조 건물들을 깡그리 쓸어 가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마 여기를 떠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통약을 한 움큼 입 속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문 좀 닫아. 찬바람 들어오잖아."
여자가 있다. 지금 침대에서 자고 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잠이 많은 편이다. 그러니 좀 더 자야한다. 그녀는 술집 아가씨다. 내 애인이기도 하다. 아니다. 애인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내 방에 와서 무작정 살기 시작했다. 내 칫솔을 쓰고, 내 와이셔츠를 잠옷 대용으로 입기도 하고, 텔레비전 채널을 자기 멋대로 고정시키기도 한다. 서로 사귀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니까 같이 살자 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어쩌다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어느 날 우리는 둘 다 술에 잔뜩 취해버렸고 그녀가 나를 부축해서 들어왔는지 내가 그녀를 부축해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부축해서 들어왔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어쨌든 그녀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는 내 방에 같이 지내는 여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음 날도, 다음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내 방에서 나가지 않고 계속 살았다. 이 골목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웨이터와 술집 아가씨. 어쩐지 싸구려 냄새가 난다.
"내 말 안 들려? 창문 좀 닫으라니깐."
여자가 짜증을 낸다. 눈자위에 푸른 멍자국이 있다. 내가 때린 것일까. 잘 모르겠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러니 내가 때린 것일 수도 있고 손님한테 맞고 온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도 누가 때렸는지 기억 못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멍자국은 그리 심해 보이지 않는다. 화장을 해서 대충 가리면 가게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가게에 나가서 장사를 할 수 있다면 그녀도 멍자국 따위에는 그리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나는 남은 캔맥주를 마저 마시고 담배를 끈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창문을 닫는다.
그녀는 어제 술에 잔뜩 취했다. 새벽이 다되어 돌아와서는 멀건이 가로등 앞에서 구토를 세 번이나 했다. 개좆같은 세상이라고 골목이 떠나가라 한참동안 발악하듯 고함을 질러댔다. 그때 약방 위에 있는 목조 건물 2층 창에 불이 켜지면서 한 사내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년아 술 처먹었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처 자!" 하고 사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층 창을 올려다보면서 "씹새끼야, 너 이리 내려와봐. 자신 있으면 나랑 씹 한번 하자" 하고 말했다. 사내는 내려오지 않았다. 다행이다. 내려왔다면 정말 씹 한번 했을 여자다. 사내가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시발놈 씹도 못하는 병신이" 하면서 집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그녀는 우울한 쓰레기통을 붙잡고 다시 한번 구토를 했고 무슨 일인지 목계단에 앉아서 한참 동안 밤고양이처럼 울어댔다. 그리고 계단 중간쯤에서 오줌을 갈기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치마를 벗어 구석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나를 노려봤다. "팬티는 왜 안 입고 다녀?" 내가 물었다. "어떤 변태 새끼가 가져갔다. 왜?" 그녀가 말했다. 여자 팬티는 가져가서 어디에 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런 놈들은 국수 육수를 뽑을 때 멸치와 함께 여자 팬티를 넣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님이 남기고 간 양주를 나에게서 빼앗아 거의 한 컵을 단숨에 마셨다. "너 미숙이 년하고 잤지?" 그녀가 물었다. 눈물 때문에 그녀의 마스카라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직도 눈에서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숙이랑 내가 잤을까? 모르겠다. 며칠 전에 가게를 마치고 미숙이랑 술을 마신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술을 마시면 매번 정신을 잃는다. "말해봐 이 새끼야 너 미숙이 년이랑 잤어 안 잤어?" 그녀가 내 멱살을 잡고 다그쳤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자기는 어떤 놈팽이에게 팬티까지 선물해주고 와서는 나로서는 기억도 안 나는 일을 자꾸 다그친다. "너는 아무 놈하고나 자잖아."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멱살을 놓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여전히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개새끼야. 나는 이게 직업이잖아." 그녀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냥 침대로 가서 엎어졌다. 그리고 금세 잠이 들었다. 그녀가 잠이 들고 난 다음에 나는 창틀에 앉아서 손님이 남기곤 간 양주를 거의 두 병이나 마셨다. 그 다음이 또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술이 취해 그녀를 다시 깨웠는지 그래서 그녀와 싸우다가 내가 그녀를 때렸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로서는 다행이다. 끔찍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아도 내 머리 속에는 이상한 안개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터질 지경이다.
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캔맥주를 한 병 더 딴다. 그리고 우울한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를 바라본다. 저 고양이에게도 무슨 이름을 하나 지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 골목에는 신호등이건 담벼락이건 모두 하나쯤은 가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골목의 여자들은 사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아가씨들이 할 짓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황폐한 오후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화투를 치거나 수다를 떨면서 온갖 것들에 이름을 짓는다. 예를 들어 골목으로 들어오는 마을 버스 표지판은 생리하는 표지판이다. 줄여서 생리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생리하는 표지판은 빚을 잔뜩 진 아가씨들이 어깨들 몰래 도망을 가다가 이상하게도 꼭 그 자리에서 잡혀서 얻어터지기 때문이다. 달건이들이 서로 싸움을 하다가 칼을 맞는 자리도 이상하게 그 자리고, 아가씨들이 술에 취해 머리를 쥐어박는 곳도 꼭 그 표지판 앞이다. 그래서 아가씨들은 이 골목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당을 불러다가 생리하는 표지판 옆에서 굿이라도 한번 벌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생리하는 표지판 옆에는 멀건이 가로등이 있다. 보통은 그냥 멀건이 라고 부른다. 멀건이는 낮에는 멀뚱멀뚱 켜져 있는데 웃기게도 한밤 중에는 꺼진다.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시외버스 터미널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그녀들은 "생리대에서 오른 쪽으로 꺾으면 멀건이 나오거든요 멀건이 따라 죽 가면 돼요."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하긴 이 골목에선 사람들도 모두 가짜 이름을 사용하는데 가로등에게 가짜 이름이 하나쯤 있다고 해서 무슨 대수인가. 골목의 이름은 단발장 스트리트다. 단발장이라는 웨이터가 이 골목에서 대빵을 먹고 있을 때 아가씨들이 지었다고 한다. 그 웨이터의 이름이 강호둥이었으면 강호둥 스트리트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단발장이란 놈을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너후나 스트리트나 강호둥 스트리트 보다는 단발장 스트리트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물론 이것은 내 생각이다.
나는 아직도 내 애인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처음에는 미나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운정이 그 다음엔 은실이었다. 조금씩 더 촌스러워지는 것을 보면 진짜 이름에 어느 정도 접근해 가고 있는 것도 같다. 가게에서는 야우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사실 그녀의 진짜 이름이 궁금한 것은 아니다. 은실은 어쩌면 진짜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진짜 이름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10년 뒤에 혹시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하더라도 그녀의 진짜 이름을 가지고 그녀를 찾지는 못 할 것이다. 하긴 10년 뒤에 그녀는 내 얼굴을 기억도 못 할 것이다.
2.
금요일! 잭이 오는 날이다. 어쩌면 두꺼비도 올지 모른다. 금요일엔 갑자기 가게에 손님이 많아진다. 그러면 잭의 아가씨들을 부르든, 두꺼비의 아가씨들을 부르든 재수 없으면 둘 다 부르든 누구든 불러서 아가씨 숫자를 맞추어야 한다. 아가씨들이 오면 당연히 잭과 두꺼비도 온다. 별로 반갑지 않은 인간들이다. 잭과 두꺼비도 서로 반갑지 않을 것이다. 잭이 오는 날에는 얼음을 깎아야 하고, 각이 없는 언더록스 잔을 준비해야 하고 주류 쪽에 전화를 걸어서 잭 다니엘도 몇 병 들여와야 한다. 국산 양주를 섞어서 뚜껑을 다시 닫은 가짜 말고 진짜 잭 다니엘. 어떤 철없는 웨이터가 실수로 가짜 잭 다니엘을 건넸는데 그걸 마신 후에 잭이 웨이터의 한쪽 눈에 이쑤시개를 박아 넣었다는 소문이 있다. 물론 그것은 잭이 몰고 다니는 무수한 소문 중에 하나일뿐이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이 골목에서 떠도는 대부분의 소문들처럼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잭에게 가짜 양주를 건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눈, 코, 귀 같은 것을 제대로 붙이고 관 속에 들어가고 싶다면 이 골목에서는 뭐든지 조심하는 게 좋다.
잭은 별명이다. 잭 다니엘만 마시기 때문에 생긴 별명일지 모른다. 애꾸눈 잭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냥 잭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잭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짝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잭은 이 골목에서만 10년째 어슬렁거리고 있다. 많은 건달들이 칼을 맞아 죽거나 감방에 갔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쳤지만 잭은 살아남았다. 한쪽 눈을 잃긴 했지만, 또 건달치고는 나이가 좀 들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직업을 가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 거리의 기둥서방치고는 장수하는 셈이다. 잭은 욕심을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아가씨 장사를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약 장사를 하거나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항상 너댓 명의 아가씨들을 거느리고 유흥업소에 접대부로 보내거나 호텔로 보내서 그 품을 뜯어먹고 산다. 큰 이권에 손대지 않으므로 조직들이 잭을 경계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가끔 큰 형님을 못 알아봐서 걔네들을 난처하게 만들곤 하지만 그걸 빼고 나면 잭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두꺼비는 좀 지저분한 놈이다. 인상도 더럽고, 성깔은 더 더럽다. 돈 되는 짓이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부두에서 약도 거래하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밀수품도 다룬다. 얼마 전까지는 조선족들의 여권 사기치는 일도 했었고, 떠도는 소문에는 장기 거래에도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될 수 있으면 상종을 안 하는 게 좋은 놈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거리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설쳐대다가는 이 골목에서 오래 버티지 못 한다.
금요일이다. 좋지 않다. 금요일에는 샐러리맨들이 단체로 밀어닥친다. 무슨 회식도 대부분 금요일이고, 회사 간부들의 온갖 접대도 대부분 금요일에 이루어진다. 가뜩이나 아가씨가 부족한 판인데 비까지 내린다. 비가 내리면 아가씨들이 단체로 생리를 한다. 히스테릭컬 해지고 우울해진다. 2차를 못 나가겠다고 생떼를 쓰고,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울어대고, 사소한 일로 손님들과 싸움을 벌린다. 게다가 우리 가게의 간판 아가씨인 그녀의 눈에는 멍까지 들어 있다. 빌어먹을, 금요일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3.
바의 오른쪽에는 잭, 중앙에는 두꺼비와 두꺼비의 새로운 여자. 그리고 왼쪽 구석에는 전직 형사였지만 지금은 은퇴한 백 반장이 앉아 있다. 최악의 테이블이다. 돈 되는 놈도 없고 싹싹한 놈도 없다. 모두 재수 없는 놈들 뿐이다. 그리고 두꺼비 옆에 새로 온 여자는 두꺼비와 정말 잘 어울릴 만큼 탁월하게 천박해 보인다.
"얼음이 좀 이상하지 않나?" 잭이 말한다.
나는 잭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라서 약간 허둥대고 있다. 요즘엔 한번 들어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감이 안 온다. 그 놈의 두통약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예?" 하고 잭에게 다시 묻는다. 잭이 손가락으로 위스키 잔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서야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머리를 살짝 숙여서 인사를 한 다음 얼음을 두 개 더 넣어서 잭 앞에 놓았다. 잭은 위스키 잔을 보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잔 속에 있는 얼음 하나를 꺼내 바닥에 버렸다.
"이봐! 착한 어린이. 내가 위스키를 달라고 할 때는 언제나 얼음 세 개야. 기억해둬."
기억해둬야겠다. 귀걸이를 사서 한쪽만 걸면서 살고 싶지 않다면 저런 말들을 제대로 기억해 둬야한다. 낮게 깔리면서 은연중에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잭의 목소리는 언제나 맘에 들지 않는다. 착한 어린이는 잭이 나를 부를 때 쓰는 명칭이다. 그것도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알겠어 착한 어린이?" 잭이 다시 묻는다. 별로 대답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예. 알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애처러울 정도로 공손하다. 잭은 알아들었으면 됐다는 듯 홀에 흐르는 음악에 맞추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바의 왼쪽에는 백 반장이 술을 마시고 있다. 그는 전직 형사였다고 한다. 나는 그가 형사였을 때는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여기서 웨이터를 하기 훨씬 전 이야기다. 내가 그를 보기 시작한 것은 형사이지만 그 앞에 전직이라는 말을 달고 다닐 때뿐이다. 지배인은 왜 백 반장에게 공짜로 술을 주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그는 형사도 아니고 더구나 건달도 아닌데 말이다.
중앙에는 두꺼비와 그의 여자가 앉아 있다. 오늘 테이블에서는 이 두 인간이 가장 짜증나는 부류다. 두꺼비의 여자는 수시로 바뀐다. 어디서 구해오는지 알 수 없지만 새로 아가씨가 들어오면 두꺼비가 일주일쯤 데리고 다닌다. 그것을 두꺼비는 교육이라고 부른다. 두꺼비의 손은 여자의 스커트 안쪽에 들어가 있다. 가끔 가슴을 주무르기도 한다. 아주 열심히 교육을 한다. 여자는 별로 거부하지 않는다. 누가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자는 두꺼비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과장된 몸짓으로 천박하게 웃는다. 저 정도 되면 바닥 중에서도 바닥이다.
"간단한 안주라도 좀 드릴까요?" 내가 두꺼비에게 물었다. 두꺼비는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피우면서 여자의 볼을 한번 만진다. 여자가 까르르 웃는다. 두꺼비가 가죽 잠바에서 담배를 꺼낸다. 나는 두꺼비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기 위해 라이터를 켠다. 그러나 두꺼비는 자신의 왼쪽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자네는 언제나 그렇게 굽신거리나?" 두꺼비가 물었다.
"착한 어린이라잖아요. 호호호." 두꺼비의 여자가 한마디 거든다.
여자의 웃음 소리가 컸는지 잭이 고개를 돌려 여자를 한번 쳐다본다. 이번에는 두꺼비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가 대신 대답을 해줬으니 상관없다. 두꺼비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다행이다. 두꺼비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면 룸이나 창고에 무슨 일이 있다는 듯이 슬쩍 바를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나는 마른 수건으로 테이블을 닦으면서 "냅킨이 떨어졌네." 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야우와 같이 산다면서?" 두꺼비가 물었다.
"같이 산다기 보다는 같은 집에 살지요." 내가 말했다.
"씹.. 새..끼 그거나 그거나."
".........."
"야우가 예전에 내 밑에 있었다고 이야기 안 하디?
"이야기 안 해도 압니다."
"야우 요즘도 섹스 잘해?"
"........"
"너랑 씹 할 때도 손님이랑 하는 것처럼 기술 많이 쓰냐구."
"......."
"이 새끼가 사람 말을 지 애비 좇으로 아네. 사람이 점잖게 뭘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할 것 아냐 이 존만한 새끼야."
"무슨 질문이었는지." 그제서야 내가 대답했다. 아마 목소리를 좀 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햐. 요새끼 봐라!"
두꺼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멱살을 잡는다. 나비 넥타이가 일그러진다. 단번에 숨이 턱 막혀온다. 두꺼비는 멱살을 잡는데 익숙하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나는 멱살을 잡히는데 익숙하다. 두꺼비는 가죽 잠바 안쪽에서 칼을 꺼내서 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잭과 백 반장을 번갈아 한번씩 바라봤다. 뭐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딴 것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야우가 니랑 공짜로 씹 할 때도 기술을 많이 쓰냐구." 두꺼비가 다시 묻는다.
"아뇨. 기술을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습니다.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요. 평범하게요. 그리고 둘 다 피곤하다 보니 자주 하지도 않는 걸요."
두꺼비 옆에 있는 여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엉망이다. 두꺼비는 만족스런 표정을 짓더니 멱살을 풀어 주었다. 웃으면서 칼로 내 배를 찌르는 척 장난을 치고 가죽 잠바 깊숙이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왜 좇 같아? 좇 같으면 한번 찔러보든지, 자."
두꺼비가 다시 칼을 꺼내 나에게 건넨다. 나는 무의식 중에 두꺼비의 칼을 받는다. 두꺼비가 왜 쌀롱에만 나오면 나에게 모욕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맘에 안 들어서 그럴 것이다. 나도 내가 맘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옆에 여자가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두꺼비는 내가 자기에게 주먹을 한방 날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야 그걸 핑계삼아 실컷 나를 두들겨 팰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쨉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두꺼비는 싸움이라면 전문가다. 두꺼비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두꺼비가 싸움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그냥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뿐이다. 그러나 이 바닥에서 혼자서 아가씨들을 데리고 기둥서방을 할 정도라면 어지간한 실력은 될 것이다. 나는 두꺼비가 준 칼을 한번 움켜쥐어 본다. 어쩌면 나도 놈의 배를 칼로 찌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놈의 배라고 해서 칼이 안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고, 지문을 찍고, 감옥에서 얼마간 썩어야 할 것이다. 감옥에 나와서는 뭘 하나. 그때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웨이터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과자로 살아갈 만한 별다른 기술이 없다. 항상 이것이 문제다. 사람을 칼로 찌르는데 나처럼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결코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나는 두꺼비에게 공손하게 칼을 건네준다. 두꺼비가 실실 웃으면서 칼을 받는다.
"나는 너 같은 놈만 보면 구역질이 나. 사내 새끼가 그렇게 속이 없냐. 진짜 사내라면 되든 안 되든 한번 덤벼보기라도 해야지. 안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한번 웃어 주었다.
"안 그러냐고 이 씹새끼야."
"예 그렇죠."
"그럼 덤벼봐! 니가 진짜 사내인지 아닌지 오늘 내가 판결해줄테니까."
"에이 그만해요. 착한 어린이라잖아요. 호호호."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여자의 입을 찢어놓고 싶다. 저 피둥피둥한 가슴을 터트렸으면 좋겠다. 백 반장은 내 꼴이 재미있다는 듯이 시종 히죽히죽 웃고 있고 그새 두꺼비의 손은 새로 온 여자의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술을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두통약도 먹어야겠다. 제기랄.
그런데 갑자기 바의 오른쪽 끝에 있던 잭이 난데없이 말했다.
"사내에 대해서 뭐 좀 아나?"
두꺼비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나도 조금 놀랐다. 잭이 자신과 자신의 여자가 관련되지 않은 일에 참견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기 때문이다.
"어이! 형씨 뭐라고 그랬어요?" 두꺼비가 물었다.
"진짜 사내에 대해서 뭐 좀 아느냐고." 잭이 술잔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 미치겠네. 어이 늙은 아저씨. 이제 그만 은퇴하고 싶나? 나이 값 쳐줄 때 그냥 술이나 마시고 서방질이나 잘 하쇼. 남의 일에 신경 끄시고. 그럼 장수 할거요."
잠시 바에 침묵이 흘렀다. 두꺼비가 자존심 때문에 거칠게 말했지만 두꺼비도 조금은 잭이 두려울 것이다. 늙었지만 잭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두꺼비가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잭을 향해 말했다.
"왼쪽 눈도 싸움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강간하다가 여자가 발가락으로 차서 그렇게 애꾸 된 거라면서? 쪽팔리게 계집질 하다가 눈깔이 빠지나."
두꺼비의 표정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자기도 말이 너무 많이 나갔다는 것을 지금쯤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잭의 표정에는 별로 변화가 없다.
"네깟 놈이 진짜 사내에 대해서 뭘 알까? 약한 놈이나 잡아서 칼장난이나 해대는 양아치 새끼가 말이야. 네가 정말 진짜 사내인지 한번 알아볼까?"
그러자 두꺼비가 일어섰다. 오른 손에는 벌써 칼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잭은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
"여기서 뜰까. 아니면 나가서?" 두꺼비가 말했다.
"힘 쎈 놈이 이기게 되어있는 게임은 사내가 할 짓이 아니야. 힘 쎈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해. 그것은 불공평하고 야비하지. 맨날 니가 하는 짓거리 말이야. 너는 진짜 사내와는 거리가 멀어. 그냥 야비한 놈 일뿐이지." 잭이 말했다.
"그럼 종목을 정해 뭐든 당신 같은 늙은이한테 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자 잭은 주머니에서 칼 하나와 동전을 꺼냈다.
"그럼 공평한 게임을 한번 할까. 나도 말만 들었지 아직 한번도 안 해봤어. 규칙은 간단해.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내가 손가락을 하나 자르고, 뒷면이 나오면 자네가 손가락을 하나 자르는 거지. 물론 자네가 동전 앞면을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누구든 그만 하자고 말하는 놈이 지는 거지. 우린 둘 다 손가락이 멀쩡하니까 동전을 스무 번 던지기 전에는 게임이 끝나겠군. 어때. 할 수 있겠나?"
두꺼비는 아무 말도 없었다. 머리 속에서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두꺼비에게는 남는 게 없는 장사다. 그렇다고 잭에게는 뭐가 남는 장사인가?
"왜 진짜 사내라면 되든 안되든 덤벼 보기는 해야한다면서?" 잭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꺼비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겁먹은 것이 확실했다. 칼을 든 손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
"하지 마세요. 미친 짓이예요." 두꺼비 옆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겁먹었군. 하긴 네 까짓 양아치 새끼가. 진짜 사내는 무슨…… 그냥 없던 일로 하지." 잭이 테이블 위에 있는 동전과 칼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잭은 기분이 좋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까지 두꺼비의 오른 손은 힘껏 칼을 쥐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두꺼비는 오른 손에 힘을 빼고 칼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착한 어린이. 우리 백 반장에게도 맛있는 잭 다니엘 한잔 드려! 잭 다니엘이야말로 진짜 사내들의 술이지. 그리고 저기 가짜 사내에게는 우유 한잔 드리고. 백 반장 이건 내가 사는 겁니다." 잭이 흥겹게 말했다. 나는 백 반장에게 잭 다니엘을 한잔 줬다. 하지만 두꺼비에게 우유를 주는 철없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잭에게 술을 다 얻어먹다니 횡재한 날이군." 백 반장이 말했다.
"고맙긴. 이봐 착한 어린이, 저기 가짜 사내에게 우유도 한잔 주라니깐. 내가 살테니까."
나는 잠시 동안 두꺼비에게 우유를 줘야할까 말아야할까를 생각했다. 잭이 계속 저렇게 나온다면 두꺼비에게 우유를 안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꺼비에게 우유를 주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잠시 동안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바에 흐르는 침묵은 팽팽하고 완강했다. 그때 바의 중앙에서 일어서 있던 두꺼비가 말했다.
"동전 던져." 두꺼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러지들 마시죠." 내가 말했다.
"동전 던지라니깐." 두꺼비가 다시 잭에게 말했다.
잭이 나에게 동전을 던졌다.
"착한 어린이. 자네가 던져. 그렇게 해야 공평하지."
잭이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두꺼비는 계속 서 있었다. 백 반장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몸을 바짝 당겨서 바의 중앙 쪽으로 조금 다가왔다.
"뭐해. 착한 어린이. 동전 던지라니까." 잭이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홀에 걸려있는 시계에서 초침 소리가 틱틱 하고 들려왔다.
"정말 이러지들 마세요…… 저는 이런 짓 못 해요. 못 던지겠어요." 나는 틀림없이 떨고 있었다. 앞면이 나오건 뒷면이 나오건 내가 동전을 던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자 백 반장이 중앙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던져도 될까?"
"누가 던지든 무슨 상관이야." 잭이 태연한 척 말했다. 두꺼비는 아무 말도 없이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백 반장이 동전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잭과 두꺼비를 한번씩 바라보았다.
동전이 날아올랐다. 동전은 공중에서 팽그르 하는 소리를 내다가 아래로 떨어진다. 그렇지만 백 반장은 동전을 받지 못 했다. 동전은 테이블 위에 떨어져서도 여전히 한참을 더 돌다가 잭의 언더록스 잔 앞에서 멈췄다.
앞면이었다!
"앞면이군." 잭이 동전을 보고 덤덤하게 말했다.
백 반장은 바에서 홀 쪽으로 두 걸음정도 물러섰다. 두꺼비는 잔뜩 경직된 자세로 여전히 서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두꺼비의 자세는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잭은 술잔에 남은 술을 마시고 나에게 한잔 더 달라고 말했다. 내가 술병을 집기 위해 돌아섰을 때 나무로 된 바의 바닥에 칼이 꽂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잭의 칼이 왼쪽 새끼 손가락을 찍었다.
"맙소사 정말로 잘랐어." 두꺼비 옆에 있던 여자가 놀라서 말했다.
잭은 힘줄과 연골 때문에 아직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건들거리는 손가락을 칼로 그어서 잘랐다. 그리고 물수건을 두 개 겹친 다음 얼음을 넣어서 손가락에 감았다. 마치 그전에도 숱하게 손가락을 잘라본 경험이 있는 것처럼 동작들이 침착하고 재빨랐다. 아주 오랫동안 바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동전 하나와 칼 하나 그리고 혼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손가락 하나가 있었고 모두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잭은 고통스러운지 이따금씩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신음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잭이 다시 말했다.
"동전 던져. 손가락은 아직 아홉 개나 남았으니까."
이번에는 백 반장도 동전을 던질 기색이 아니었다. 그때 두꺼비가 말했다.
"이 늙은이가 정말 미쳤군. 정말 미쳤어. 이게 무슨 진짜 사내를 판단하는 게임이야. 나 참 웃겨서. 그냥 차라리 밖에 나가서 싸우자고. 사내답게. 이건 미친 짓이니까. 이거 미친 짓 아니야? 안 그래?" 두꺼비는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듯이 우리를 한번 둘러보았다. 두꺼비는 공포에 잔뜩 질려있었다. 그렇지만 모두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심지어 두꺼비가 데리고 온 여자까지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잭이 손을 움켜쥐고 조용히 말했다.
"너의 그 싸구려 아가씨들을 데리고 이 골목을 떠나. 싫으면 여기다 손가락을 몇 개 내 놓든지."
두꺼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칼과 잘려진 손가락과 온통 수건을 적신 붉은 피를 바라봤다.
"미친 새끼." 그렇게 말하고 두꺼비는 밖으로 나갔다. 두꺼비의 여자는 겁 먹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곧 두꺼비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오분 쯤 있다가 백 반장도 쌀롱을 나갔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잭은 평소처럼 말없이 계속 술을 마셨다. 대신 평소보다는 훨씬 많은 술을 마셨다. 주류에서 사다 놓은 잭 다니엘 세 병을 전부 다 마셨으니까. 잭이 세병 째 술병을 다 비웠을 때 나에게 물었다.
"착한 어린이 혹시 사람을 찔러본 적이 있나?"
"그럴 리가요" 내가 말했다.
"사람을 찔러 본 적이 있나요?" 내가 물었다.
"몇 번은……" 잭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몇 번은 찔러야하지. 몇 번은 찔러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다시 잭이 말했다.
4.
일요일 아침이다. 며칠 째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캔맥주를 딴다. 두통약을 한 움큼 집어삼킨다. 창밖에는 우울한 쓰레기통이 있고 여전히 고양이가 우울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어쩌면 오늘은 고양이도 보람이 있을 것이다. 어제 가게의 셔터를 내리고 나는 혹시나 싶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잭의 손가락을 검은 비닐 봉지에 싸서 우울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니 잘 뒤져보면 제법 먹음직한 고깃덩어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잭은 토요일 아침에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다. 진짜 사내는 자기 손으로 손가락을 자르고 남의 칼에 찔려 죽는다. 잭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어김없이 생리하는 표지판 앞이었다. 정말 아가씨들 말대로 무당이라도 불러서 굿이라도 한판 해야겠다. 그리고 토요일 점심에는 두꺼비가 찾아왔다. 저녁에 쌀롱으로 경찰이 올건데 그러면 자기는 그날 저녁에 백 반장이랑 7번 룸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말하라며 꽤 두툼한 돈봉투를 주고 갔다. 토요일 저녁에는 정말 경찰들이 가게로 찾아 왔다. 나는 두꺼비가 7번 룸에서 백 반장이랑 밤새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확실하냐고 물었고 나는 확실하다고 말했다. 다른 것은 진짜 사내들끼리 알아서 잘 할 것이다.
토요일 밤에는 야우가 술에 잔뜩 취해와서 나에게 물었다. 나를 사랑해? 나는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씹새끼야 이게 사랑이야 이게 사랑이냐구 사랑하는 놈이 생리하는 애인을 억지로 2차 보내냐 이 씹새끼야? 야우는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사실 그날 밤에는 나도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 그랬으니까 화장으로 가릴 수도 없을 만큼 정신없이 야우를 때렸을 것이다. 그럼 뭐가 사랑인데. 그냥 같이 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씹하면 사랑하는 거지. 뭐가 더 필요해. 이 쌍년아.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는 우울한 쓰레기통을 보고 있다. 나는 우울한 쓰레기통이 좋다. 온갖 쓰레기 비닐 봉지들을 몸에 담고서도 그저 말없이 우울한 표정만 짓고 있는 저 쓰레기통. 나는 저 쓰레기통이 맘에 든다. 다시 담배를 문다. 빗줄기가 점점 더 강해진다. 목조건물이 쉴새없이 삐걱거린다. 고양이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통 속에서 잭의 손가락을 찾았을까. 고양이는 영민한 동물이니까 아마 찾았을지도 모른다. 찾았다면 고양이는 지붕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캔맥주를 한 병 더 딸까.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몇 병 더 마셔도 된다. 계속 캔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까 일요일은 좋은 날이다. 오후에는 아직까지 한번도 올라가 보지 않은 이 목조 건물의 지붕 위에 올라가 볼까 한다. 어쩌면 지붕 위에는 고양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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