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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스코어 - 26
26년 만에 토종 야생 여우 발견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손끝으로부터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설레던 가슴이 알 수 없는 희열로 가득 차 빠르게 뛰었다. 이 희열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우스꽝스럽기조차 한 상황에 대해 기쁨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단지, 그 희열이 도시의 잿빛 일상과 인간관계 너머 아득한 본능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과, 매우 돌발적으로 발생한 그 상황에 대해, 또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필자는 멈추었던 숨을 내쉬고, 곧 폭발할 것처럼 잔뜩 물오른 잎눈을 매달고 있는 가로수 가지를 놓아주었다. 가지가 스프링처럼 손끝을 빠져나가 진동 폭을 줄여가며 허공 속 제자리를 찾아갔다. 길을 재촉하느라 마주 오는 사람들과 몇 번이나 어깨를 부딪칠 뻔 하면서도 곧 새순이 돋으리라는 황홀한 기대에 다시 가슴이 뛰었다.
위의 상황은 며칠 전 일 때문에 밤을 샌 필자가 다음 날 아침에 겪은 일이다. 잠을 못 자고 커피를 많이 마셔서 잠깐 감수성 과잉의 상태가 되었던 것 같다. 꼭 그런 상태가 아니더라도, 늑대나 여우처럼 인간도 동물이어서 진화의 역사를 함께 한 자연을 접할 때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낀다. 지난 24일 환경부에 따르면, 전날 오후 3시께 강원도 양구군 동면 덕곡리 뒷산에서 다 자란 토종 여우 수컷이 죽은 채 발견됐다. 여우가 다시 발견된 것은 실로 26년 만의 역사적인 일이고, 그래서 이번 주 파이널 스코어는 26이다.
여우만큼 인간과 가까우면서도 인간에게 욕 많이 먹은 짐승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우의 이미지는 악의 화신에 가깝다. 필자도 어렸을 땐 여우를 악마의 ‘예명’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런 배경에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나라 각지의 전설을 극화해서 일주일에 한 번 방영하던 <전설의 고향>은 납량특집극이 방영되는 여름에 그 인기가 더욱 치솟았다. 여기에 귀신과 함께 ‘전속배우’(?)로 출연한 것이 여우다. 여우는 매주 부지런히 사람들을 홀리고 잡아먹고 간을 빼먹고 시체를 파먹었다. <전설의 고향>의 ‘왕팬’임을 자처했던 필자가 여우를 곱게 볼 리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역시 전설, 민담을 통해 가지게 된 나쁜 이미지 때문에 이유 없이 여우를 죽이기도 했을 것이다.
공포는 폭력의 어머니다. 개들도 공포를 느낄 때 가장 맹렬하게 짖고, 모든 동물들의 어미는 새끼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육아기에 가장 사나워지며, 나치가 유태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도 따지고 보면 유태인들이 자신들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으며, 대중의 공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물론 인간에게 자연은 개척하고 극복해 나가야 할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쪽이 진정한 공포의 대상인지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각해보자. 홀려서 가축이나 애완동물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살 뜯어먹고 간 빼먹는 것도 사람이다. 인간의 자연 개척과 극복, 또 그 미명하의 이윤추구가 이루어낸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삶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전 지구적으로 볼 때 진정 의미 있는 변화는 수많은 형제 종들의 멸종과 환경 재앙이다. 환경부가 여우 발견을 발표한 다음날,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는 20세기에 해수면이 약 15-20cm 상승했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죽은 채로 발견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26년 만에 발견된 야생 여우는 반가운 손님이다. 더불어 야생 여우 복원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하니 더욱 반갑다. 강원도 어디쯤의 야생동물보호구역 안에서 호랑이며 곰, 늑대, 여우가 새로운 전설들을 만들어내며 뛰노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는 풍경이다. 그들은 악마나 괴물, 돈벌이를 위해 맞바꿀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모두가 진화의 위대한 승리자들이다. 이제 생태계 전체에 좀 더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자.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막 눈을 뜨는 새순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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