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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6-12 14:01:24 / Hit:2285  

1인칭 소설 (2)

서울에 오고나서 3년 동안, 즉 내가 여덜 살이 될 때까지의 기억은 아주 단편적인 것들 뿐이다. 온 식구가 조개탄 가스에 중독되어 정신없이 토하고 우리가 세 살던 집의 주인 아주머니가 퍼다 준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야 살아나던 일, 나보다 조금 큰 아이들과 더불어, 당시만 해도 숲이 무성하던 인왕산(仁旺山) 기슭에 올라가 개울의 돌 밑에서 가재를 잡거나(나의 경우, 잡는다기보다 다른 아이들이 잡은 걸 얻어 갖는 게 더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햇빛이 가득 비친 나뭇가지에 꼼짝 않고 붙어있는, 빛갈 영롱한 풍뎅이를 잡던 일(이건 나도 할 수 있었는데 그 때의 흥분은 지금도 내 몸 속을 환하게 만든다), 어느 산이던가(역시 인왕산이었는지... 아니면 남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세검정 너머 북한산이었는지도...), 역시 나보다 큰 아이들을 따라서 산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문득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파란 하늘을 만져볼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던 일, 횟배를 앓아 할머니를 따라서 염천교 다리를 지나 한의원에 가던 일, 늦은 홍역으로 한여름 철에 방 안에 꼭 갇혀서 할머니가 얻어다 준 참새 한 마리를 줄에 매어 날리면서 놀던 일, 맛있는 줄도 잘 모르면서 큰 아이들이 그러는대로 아카시아 꽃잎을 한 주먹씩 입에 넣고 씹던 일 등등...
이 무렵, 어머니가 이따금 꿈 속에 나타나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무렵엔 어머니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대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나는 어머니가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또렷해졌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 엄마가 정말 죽었어?"
" 그러엄"
" 엄마가 어디로 가는 걸 내가 분명히 봤는데두?"
" 으응, 친정에 가서 죽었단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지금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있다. 할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것인데 그 분이 돌아가신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사진을 내가 가지고 있다. 조금 기이한 사진이다. 좁다랗게 긴 직사각형의 사진인데 원래의 사진에서 좌우를 잘라내고 남겨진 부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진관에서 찍은 것인 듯, 할머니가 나를 무릎 위에 안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전신상으로 찍혀있고 할머니의 오른 쪽 어깨 뒤에 서있는 남자의 어깨 일부와 한 쪽 팔만이 남아있다. 아마 아버지의 팔일 것이다. 가족이 다 함께 찍은 사진인 모양인데 가족의 다른 구성원을 볼 수 없도록 누군가 잘라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 사진에 원래 어머니의 모습도 들어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잘라낸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한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잘라냈다고 말했다.
" 입을 벌리고있는 제 모습이 보기 흉하다고 잘라버렸단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모습도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의 어떤 손길이 담긴 단 한 점의 유품을 가지고있는 셈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손길은 나에게서 어머니 자신의 모습은 깨끗이 앗아가버린 결과로 남았다. 어머니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잘라낸 사람은 어쩌면 할머니인지도 혹은 아버지인지도 모른다. 또는 고모일는지도... 그들은 각기 또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들은 어머니에 관해서만은 오랫동안 나에게 거짓말장이들이었으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덜 살 때부터의 기억은 한결 선이 분명하고 또렷하다. 그 중에서도 찐빵 가게 조씨(曺氏)아저씨에 관한 기억은 지금도 바로 엊그제 일같이 선명하다.
청진동 살 때 일이다. 아버지는 과일 행상 따위를 거쳐 그 무렵에는 종로에서 청진동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목을 잡아 리어카 위에 제법 여러가지 물건들(이라야 통조림깡통이나 과일류, 쵸콜릿이나 껌, 비스켓같은 과자 나부랑이에 불과했지만)을 늘어놓고 노점상을 하고있었다. 아버지의 그 노점 바로 옆, 골목 모퉁이 집이 조씨아저씨의 찐빵 가게였다. 아버지와 조씨아저씨는 이웃에서 장사를 하게 되어서인지 곧 친구가 된 모양이었고 조씨아저씨네에는 나보다 모두 조금씩 크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있었으므로 나는 학교가 파하고나면 아버지한테 들렀다가 이따금 조씨아저씨네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조씨아저씨네 아이들한테서 나는 많은 걸 배웠다. 어느 골목 몇 번째 집 바깥으로 난 창문엘 밤에 무등 타고 올라가 들여다보면 그 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뭐뭐 하는 걸 볼 수 있다는 둥, 어느 때는 서로 엇바꿔 누워서 아주 재미있는 짓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는 둥, 하는 따위의 어른들이 아이들 몰래 하는 짓의 용렬스러움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B29라는 비행기의 대단한 위력에 관한 지식, 또는 일본을 항복하게 만든 원자폭탄이라는 어마어마한 폭발탄에 관한 지식, 계집애들의 가랑이 사이에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물건을 자신의 무릎 밑 장딴지와 허벅지가 만나는 지점의 부드러운 살을 이용해서 만드는 방법( 이 때부터 내가 여자애들의 성기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따위를 나는 그 애들한테서 배워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것들을 내게 가르쳐주다가, 어쩌다 조씨아저씨가 가게에서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때는, 그 애들은 시치미를 떼며 입을 다물곤 했는데 그 때의 조씨아저씨는 대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언제나 사람좋은 웃음을 우리에게 지어보이곤 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자기 아이들에게, 나가서 찐빵 좀 가져다 나에게 주라고 이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꼬박꼬박 내게 이렇게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너, 이 녀석 이 번에 2등 했다지? 다음엔 1등 할 자신 있냐?"
그러나 나는 항상, '지난 번에도 그렇게 물어보셨잖아요'라고는 말하지 않고 그냥,
" 네, 자신 있어요"라고만 대답했다. 나는 어쩐지 자기가 한 말을 그렇게 잘 잊어먹는 조씨아저씨가 까닭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조씨아저씨는 그런 내 대답을 듣고는 늘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 허, 그 녀석 뱃장 한 번 맘에 드네"
그러나 나는 그런 조씨아저씨의 표정에서 가끔 뜻밖의 조금 슬픈 듯한 기색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도 길쭉한 편인 조씨아저씨는 살갗이 종잇장처럼 늘 하얬기 때문에 그런 슬픈 기색이 떠돌 때에는 바라보는 사람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무엇인지 아주 고귀한 것을 보았을 때 생기는 것과 비슷한 조금 슬픈 듯한 마음이 이 쪽에도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대체로 조금 우습광스럽게 굴고, 사람좋은 그 웃음을 늘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씨아저씨는.
그 조씨아저씨가 그런데 빨갱이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라기보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짜리 어린 아이였던 나로서는 놀랄 능력이 없었다는 게 옳겠다. 왜냐하면 나는 빨갱이라는 것이 나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왜 사람들이 수근대는 것인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아직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동네 아이들이나 조씨아저씨네 아이들도 그런 것은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다만 조씨아저씨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람들 몰래 '삐라'를 뿌리고 다녔다든지, 남의 집 담벼락에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든지 하는 일들이 왠지 무슨 아주 장한 일이나 훌륭한 일처럼만 여겨졌고(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내 생각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가 경찰서에 잡혀간 일이 더없이 마음 아팠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 조씨아저씨는 정말 나쁜 짓을 했나요, 아버지?"
아버지는 신중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하였다.
" 그 사람은 법을 어겼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된다. 차차 크면 너도 알게 될 거야"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세들어 살던 청진동 집에서 딴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는 바람에 조씨아저씨에 관한 그 후의 소식은, 그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 이외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나 내 어린 뇌리에 박힌, 조씨아저씨의 어딘지 모르게 슬퍼보이던 모습은 왠지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에 온 이후에 몇 차례인가의 이사를 했는데(거의 1년에 한 번 꼴이 아니었나 싶다), 새로 이사한 곳은 당시의 '덕수국민학교' 뒷 담 가까이 있던, 여러 가구가 함께 세들어 사는 낡은 한옥이었다. 우리는 문간방에 세들었다. 조그만 들창문이 골목 쪽으로 달려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동란'(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불렀다)을 맞았다.
여기서, 빼먹은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그 사이 나에게는 차례바꿈으로 두 명의 새 어머니가 생겼었다. 한 어머니는 나에게 어머니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고 그 뒤의 다른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느낌을 주려고 무척 애쓰는 것같았지만 역시 어머니라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두 번째 새 어머니가 조금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우리와 오래 함께 살지 못했다. 할머니가 틈틈이 그들의 나쁜 점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때마다 아버지가 화를 내는 모습도 보았지만 웬일인지 얼마 후부터는 원래의 우리 식구만 남았다.
고모 이야기도 조금 하자. 고모는 우리가 서울에 온 이듬해(열 여섯 살이었다)부터 무슨 악극단(樂劇團)이라고 부르는 곳에 들어갔는데 집에 없을 때가 많았다. 지방에 공연을 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펄펄 뛰며 말렸지만 (아버지가 고모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모두 자른 적도 있다) 고모는 기어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했다. 지방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있을 때는 내 속눈썹을 가지고 놀기도 했다. 화장품 갑의 뚜껑같은 것으로 내 속눈썹을 감아서 말아올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넌 속눈썹이 아주 길구나. 나도 너만큼 길면 얼마나 좋을까"
지방에 가있는 동안에는 더러 내게 소포같은 것도 부쳐주곤 했는데 그 중에는 만화책도 있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만화책은 '홍길동'이었다. 내가 나중에 무협 취향을 갖게 만드는 작은 싹이 이 때부터 자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동란'을 맞았을 때 고모는 지방에 가고  없었고 남은 우리 세 식구는 대개의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대비없이 그 사태를 맞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되던 해였다.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6월이었다. 그리고 월요일이었다. 나에게 6.25는 월요일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오전 수업(학과 수업이 진행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만을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의 거리는 유난스레 햇빛이 환한 공일날 같았고 어딘지 들떠있는 것 같이 보였다. 평소엔 잘 볼 수 없던, 군인들을 가득가득 태운 트럭들이 줄지어 지나가곤 했다. 행인들의 표정도 다들 조금 상기한 것같았다.
그 다음 날 나는 앞당겨진 여름방학을 기뻐하며 놀러 나갔다가 노량진 쪽으로 걷게 되었고( 이유는 모르겠다. 집에서 나와 큰 길을 따라 걸으면 저절로 잡히는 방향 아니었나 싶다)  걷던 도중, 하늘에 뜬 비행기가 떨어뜨리는 검은 물체를 피하기 위해 어른들과 함께 가로수 밑둥에 고개를 쳐박고 엎드리기도 했다. 그 검은 물체는 굉장히 요란한 소리를 냈던 것 같다. (그게 내가 겪은 첫 번째 공중폭격이었는데 나중에 겪을 미군의 폭격에 비하면 지극히 서툴고 빈약한 공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도 다쳤던 것같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걸어서 기어이 노량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역시 이유는 모르겠다. 뭔가 들떠있었거나 좀 멍청해져 있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한테 회초리로 맞았다. 할머니도 말려주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한테 회초리로 맞은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학교에 들어간 뒤 내겐 언제부턴지 도벽이 생겨있었는데 밤에 몰래 일어나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번번이 돈을 훔치거나 학교에 갖다내라는 월사금을 내 멋대로 써버리기도 하였다. 먹고 싶은 것을 사먹거나 혼자서 영화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칠 때 나는 매우 신중하게,(아, 이 때의 긴장감은 지금도 내 몸을 졸아붙게 한다) 아버지가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작은 액수만 훔쳐냈는데도 아버지는 용하게 알아차리고는 나를 회초리로 몹시 때리곤 하였다. 나의 그 도벽은 열 두 살까지 이어진 후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아주 심하게 맞고나서 그쳤는데 이때 잠복했던 도벽이 훨씬 뒤에 아주 참괴스런 형태로 재발된다. 어쨌든 아버지가 회초리로 나를 때릴 때마다 할머니는 잠시 내버려두었다가는 곧 내 몸을 감싸며 말려주곤 했었는데 이 때는 끝까지 말려주지 않았다. 말려주기는 커녕 아버지를 편들어 나를 나무라기까지 하였다. 이 때 처음 나는 할머니를 미워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나는 새로운 군인들을 보았다.
아침에 골목 쪽으로 난 들창 밖이 수런거리는 듯한 느낌에 나는 잠을 깼다. 그리고 일어나서 들창문을 열었다. 창 밖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꽤 값비싸보이는 가구 따위를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있었다. 모두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나중에야 나는 그 물건들이 부근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있었던 물건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미국 대사관에 있었던 물건들 가운데 '캬라멜'이라는 것을, 나는 조금 뒤에, 처음 보는 새로운 군인들한테서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미국 대사관 들어가는 어귀, '경기여고' 축대 밑에 세워둔 탱크와 함께 있었다. 탱크는 정말 크고, 무겁고 우람해보였다. 아침 햇빛을 받으면서 하늘을 향해 뻗친 포신(이름은 나중에 알았지만)은 정말 멋졌다. 그리고 엊그제 본 군인들과는 조금도 닮지않은, 낯선 복장을 한 그들은 탱크 주위를 빙 둘러싸고 감탄의 눈초리를 보내고있는 아이들에게 그 '캬라멜'을 나누어 주었다. 한 아이가 외쳤다.
" 야! 미제 미루꾸다!"
" 응, 캬라멜이라고 한다"
그 새로운 군인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들은 모자도, 군복도, 견장도 모두가 정말 달랐다. 한 사람은 탱크의 뚜껑문을 열어젖힌 채 상반신만 내밀고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탱크에 기대 선 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한 아이가 그 '캬라멜'의 포장 종이를 벗기고 알맹이를 입 안에 넣으면서 말했다.
" 아저씨, 권총 좀 한 번 쏴보세요"
" 응? 권총?"
" 네, 쏴보세요!"
아이들이 다 같이 소리쳤다. 아이들은 이 새로운 군인들이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같았다.
" 그럴까..."
권총을 찬 군인이 오른손을 허리의 권총집 쪽으로 가져가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표적이 될만한 물건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탱크의 뚜껑문을 열고 앉아있던 군인이 탱크 속으로 고개를 숙여 '데스까부도' 하나를 끄집어냈다. 국군의 철모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그 '데스까부도'는 좀 낡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그는 권총 찬 군인에게 넘겨주었다. 권총 찬 군인은 그것을 '경기여고' 축대 밑에 엎어놓고는 허리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팔을 쭉 뻗어 겨냥하고는 쏘았다. 우리는 미리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으므로 생각보다 소리가 그다지 크다고는 느끼지 않았으나 그 '데스까부도'가 힘없이 퀭, 구멍이 뚫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철모가 아니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재질이 다소 약한 것이었는지도...) 권총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고 또 쏘는 모습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그리고 그 위력을 그렇게 직접 눈으로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으므로 우리는 모두 기분이 몹시 좋았다. 나는 이 장면을 못본 아이들은 참 안됐다고 생각하였다.
그 새로운 군인들 중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했다.
" 우리는 인민해방군이다. 또 우리는 어린 동무들의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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