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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스코어 - 12
만두여 안녕!
때로는 반달 모양의 미소를 지으며, 때로는 골뱅이 모양으로 웃으며 내게 다가와 살포시 입 맞추던 그대여, 일용하는 양식들은 결코 흉내 내지 못할 만족감으로 나를 감동시키던 그대여, 상처받고 텅 비어버린 내면을 차곡차곡 채워주던 그대여, 사랑하는 만두여, 이젠 너와 작별하려고 해. 이젠 더 이상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너는 내게 특별한 존재였어. 학교 매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 가벼운 주머니만큼 홀로 덩그러니 놓인 라면의 풀어헤친 파마머리가 우울하고 히스테릭해 보일 때, 가끔씩 너를 함께 사서 호사를 부리기도 했지. 그럴 때면 평소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놈들도 갑자기 친절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 공손하게 묻곤 했지. “한 개 먹어 봐도 돼?” 나는 큰 호의라도 베푸는 양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줬지.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며. ‘너, 앞으로 잘해.’ 사실 가슴이 아팠어. 너를 정말 사랑했거든. 하지만 그들도 너를 먹을 때가 있을 거라는 걸 나는 알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지.
사랑은 때때로 분노로 변하기도 했어. 친구들 여러 명이서 자장면을 주문하고 모두들 노릇노릇하게 선탠한 네 섹시한 자태를 기대하고 있는데 덜렁 단무지만 함께 배달되었을 때. 우리들의 당혹감과 절망감, 짜증은 건강한 상도덕의 실종,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의 문화’의 소실, 한국 서비스산업 전반에 걸친 서비스정신의 부족 등에 대해 한 마디씩 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마침내 거대한 분노의 불길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성질 급한 녀석이 중국집에 다시 전화를 했지. “아저씨, 거긴 군만두 안 줘요? 자장면만 시키면 안 준다고요? 여러 명이서 시켰잖아요? 저번에 다른 집에서는 줬는데. 그래도 안 된다고요? 우리 음식 많이 시켜먹는데 이제부턴 거기서 시켜먹지 말아야겠다. 금방 갖다 주신다고요?” 이런 통화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다 함께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기뻐했지만,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는 중국집 주인이 걸려 대화가 잘 풀리지 않으면 고함까지 지르며 싸우기도 했지.
네가 정상적(?)으로 서비스되었다고 해도 문제는 있었지. 한국사회에선 ‘분배문제’가 여전히 큰 이슈잖아? 그릇에 코를 박고 자장면을 입으로 처넣으면서도 우리는 모두 너만 바라보고 있었어. 얼른 한 개씩 집어먹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우리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뻔뻔한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개를 더 집어가려 한다던가, 아예 두 개를 한꺼번에 집어가려 하는 녀석이 있으면 우리는 결연히 나서 젓가락 칼싸움을 벌였지. 때로는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어. 얼굴에 자장이 튄다든지 끊어진 면발이 이마에 붙는다든지 하는 불상사도 가끔 일어났거든.
우리가 왜 그렇게 분노와 울분을 토하고 위험한(?) 결투까지 불사했는지 알아?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아,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일이 벌어질 줄이야! <만두부인 속 터졌네>라는 에로비디오가 나왔을 때 알아챘어야 했어. 그 제목에 우리 사랑의 종말에 대한 묵시록적(?)인 암시가 들어있을 줄이야! 지난 6월 10일, 불량재료를 사용한 `쓰레기 만두소'를 공급받아 만두를 만들어 온 업체들의 명단이 공개됐어. 고향냉동식품, 비젼푸드, 진영식품 서울공장, ㈜진영식품 파주공장, ㈜삼립식품, 천일식품제조, ㈜우리맛식품, 소디프이엔티(에이콤), 신한식품, 우정식품(만발식품), 참좋은식품, ㈜기린식품 등 12개 회사야. 이번 주 파이널 스코어는 당연히 12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일주일 전에 사다놓고 뜯지도 않은 냉동만두를 얼른 꺼내 보니 다행히 겉봉에 적힌 업체명은 그 명단에 없었어. 하지만 뒷면을 보는 순간, 맙소사, 딱 걸렸어. 따로 작게 표기된 제조업체명이 12개 업체 중의 하나야. 너를 어떡해야 하니?
이제 다 끝났어. 이젠 내 사랑을 거두려고 해. 지금껏 냉동실에 네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허해질까봐 맘 졸이며 살아왔지만, 수많은 불면의 밤, 라면과 더불어 내게 가장 큰 위로를 줬던 너였지만 이젠 더 이상 널 사랑할 수 없어. 우리들이 함께한 시간은 아름다웠어. 만두여,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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