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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를 잊지 않으리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다. 아니 이미 폭풍의 눈 안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이 폭풍이 어느 쪽으로 불까. 광화문과 전국을 뒤덮었던 촛불로 세 차례의 한반도 규모 후폭풍이 우선 지나가고, 백팔배다, 삼보일배다, 아니면 박풍이다 노인풍이다 해서 어줍잖은 반대풍도 몇 차례 지나갔다. 한 달이라는 짧은, 혹은 긴 시간 동안 이런 자디잔 바람들도 여러번 불다 보니 곧 다가올 마지막 태풍의 풍향도 섣불리 예측하기 곤란한 상태에 놓이기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3·12 의회폭거를 발원지로 한 이런저런 바람들이 불대로 불고, 이제 마지막, 주권자 국민이 모두 불러일으킬 최후의 태풍만 남았다는 점이다. 마지막 태풍의 위력은 3·12 폭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기로 2004년 내내 한반도 전체를 나락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을지 모른다.
4월6일 총선연대는 2004 총선 낙선대상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확실한 현역 의원 100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아니면 이들 중 당과 지역을 잘 둔 상당수 의원들이 여의도에 재입성한다고 치자.
이들은 선거운동 기간에 마치 자기들은 탄핵 따위는 하지 않은 듯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시종 대중인기 영합주의, 곧 그네들이 잘 쓰는 용어로 ‘포퓰리즘’ 방식의 선거 전술을 구사했다. 이들은 우선 ‘절하기’부터 시작하였다. 그들이 평소 얼마나 절에 열심히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마치 시범경기 하듯이 열심히 절을 올렸다.
절집에서 절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일이다. 절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절은 세 가지 죄악, 즉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죄악을 몸으로 씻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절하고 나서 하는 말과 짓과 뜻은 절하기 전과 달라져야 진정 절하는 일이 완성된다. 따라서 절집에서 절은 오직 부처님이나 높은 뜻을 이룬 선각 앞에서, 다른 절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혼자서 아무나 붙잡고 남이 멀뚱거리는 것을 상관치 않고 임의로 허리와 다리를 굽혔다 폈다고 해서 절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말과 짓과 뜻이 절하기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절이 아니라 몸을 구부렸다 편 스포츠 행위일 뿐이다.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절했다고 믿게 하는 일종의 착시 유발행위일 뿐이다.
그네들이 정말 속죄하는 심정이었다면 왜 ‘말’로 하지 않고 ‘절’만 했는가 당연히 ‘말하기’ 싫어서다. 왜 ‘말’을 하기 싫었을까 ‘말’은 상대를 보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말은 일종의 약속인데, 이들은 ‘몸’을 굽혔다 편 것으로 ‘말’과 ‘뜻’의 업까지 씻어내는 것을 회피했다. 이들은 속죄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속죄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국민을 말상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절만 하고 말은 삼킨 이들이 4년 간의 의회권력을 다시 보장 받는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 한달 전의 3·12 폭거가 그야말로 그네들 선대의 진짜 쿠데타만도 못한 정치적 졸작으로 전락한 가장 큰 이유에 대해 이들 100명의 잔당들이 한 달의 고통 속에서 그 어떤 교훈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순진한 일이다.
당연히 이들은 방송사를 찾아가는 수고를 할 것도 없이 언론관계법들에 손 댈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가장 겁주고 결국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좌절시킨 촛불시위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도록 집회와 시위 관련 법규들, 그리고 관계 공무원들을 대폭 갈아치울 것이다. 자기들이 부른 임시국회에 와서 국정 연설을 하지 않았다고 이번엔 총리 불신임안을 낼지도 모르겠다. 아하, 인터넷 실명제는 지독하게 엄격히 실행될 것이다. 헌법재판관들에게도 은근히 탄핵 압박을 가할지 모르겠다.
좋다. 합법적 절차만 따르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저들의 정치적 무분별에 나는 더 이상 희망은 없다. 그러나 수행의 정도인 절을 앵벌이 수준으로 격하시킨 이들에게 다시 상처받은 나의 종교적 자존심만큼은 견딜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래 4월15일, ‘나’는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 그걸로 갈음하겠다.
홍윤기/동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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