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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상자를 하나씩 갖고 살아간다. 마음 속에. 우리는 얼어야 할 때 상자를 연다, 단 한번. 그 뿐이다.
그 남자는 상자 하나를 갖고 있다. 아주 작은 상자이다. 가로세로의 비율이 조화로운 탓인지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표면에는 부드럽고 가는 곡선 모양의 조각이 한 면에 새겨져 있고, 그것은 손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만큼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데가 있다. 은으로 만들어진 상자는 아름다운 빛을 띠고 있고. 그대로 두면 안개비처럼 흐려진다. 빛나는 쪽과 흐린 쪽. 어떤 상태든 바람직한 것이었다. 남자는 틈이 나거 마음이 내키면 수건으로 닦아주고, 바쁘면 그대로 둔다. 그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열 마음만 있다면 간단히 열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상자를 열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언제부터 이 상자가 자신의 것이 된 것일까. 남자는 때때로 이 일을 생각해본다. 기억 저편의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다.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상자를 받았을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네 친구였던 외국인인 작은 사내아이에게서 받았다. 외국인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듯해서 지금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기회로 받은 것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름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른 봄의 숲이거나, 가을의 해변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자에 관한 선명한 한 가지 기억. 상자를 건네 받을 때의 말이다. 어조까지 똑똑히 귓가에 남아 있다.
" 이 상자 안에는 아주 멋진 게 들어 있어. 힘들 때 열어봐. 문제를 해결해 줄거야. 그런데 도움이 되는 것은 그 한 번 뿐이야."
남자는 곧잘 그 목소리를 실마리로 하야 상자를 준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해본다. 하지만 매번 무언가 얇은 막으로 차단된 느낌이 든다. 애가 탄 그는 ' 이 상자를 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명료해질 것이다.'라고. 확신도 유혹도 그리고 충동도 섞이지 않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때마다 강하게 단념라곤 한다. 함부로 상자의 힘을 써버린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상자에 정말 그런 힘이 있는 것일까. 마음만 먹으면 상자는 열릴까.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다. 손끝에 조금만 힘을 주어 상자를 열어보면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상자의 진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다. 상자의 힘은 사라지고 후회가 상자 안을 차지하게 될 지도 모른다.
소년 시절, 남자는 상자를 줄곧 자신의 가슴에 감추고 지냈다. 부모와 형제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더없이 신나는 일이고, 기쁨을 준다. 그리고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이국 소년과의 재회 때 두 사람만의 비밀이 훼손되어 있다면,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으리라. 남자는 상자를 천으로 싸서 장난감 상자나 마루 밑 돌 뒤에 숨겼다. 복잡한 장소일 경우 그 곳의 도면을 그려서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하긴 도면으로 나타내지 않아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항이엇다.
어린 그는 이런저런 장남감을 가지고 놀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질리기 시작했다. 태엽 감는 움직이는 인형과 전기로 달리는 기관차도 당시에는 무척 경이로웠지만, 차츰 흥미가 덜해졌다. 그러나 문제의 상자는 언제까지나 신비로움을 잃지 않았다.
학생이 되어 수험공부로 괴로운 시기에 남자는 몇 번이나 상자에의 유혹을 느꼈는지 모른다. 이 한숨의 나날들을 일순간에 지워줄 것이다. 손의 근육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때마다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손을 멈추었다. 특별히 자제심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생의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알았고, 장래에 어쩌면 더욱 절실한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했을 때 상자를 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기는 했다.
청년 시절, 상자에의 충동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랑은 젊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감정이 미칠 듯이 고조될 때마다 남자는 언제나 상자를 열 결심을 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부터 저지의 소리가 들려오고,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기를 거듭했다. 남자는 열광하는 짬짬이 냉정한 때를 골라, 상자를 응시하며 자문해보았다.
" 그 여자에게 열을 올렸을 때, 상자를 열어야 했던 것일까?"
자신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 그 정도의 여자는 아니었어."
상자 안을 공허로 채웠을 때의 수지 계산은 명확하다. 연애 문제로 상자를 열 수는 없었다. 상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여자에게 채여 비참한 기분에 빠졌을 때, 상자를 손에 들면 마음이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남자는 평범한 결혼을 했다. 그 무렵에는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잇었다. 자신이 아무리 평범해도 상자의 힘이 아직 보전되어 있고, 언젠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대개의 불만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남자는 상자에 관해 아내에게도 친한 동료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엇다. 이야기 하면 웃음거리 밖에 안 될 것이 뻔하다. 또 상대가 믿어준다면 상자는 열려질 게 뻔하다. 그것도 시시한 이로.
이윽고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남자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남자는 상자를 열지 않았다. 양친 어느 쪽에 대해서 사용할지 결정하기 어렵고, 부모님이 기뻐해줄지 어떨지도 의문이었던 것이다. 상자를 잡고 가볍게 흔들어본 적이 있다.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무엇인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귀를 갖다대면 강이 흐르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자신의 피가 혈관을 따라 흐르는 소리일 것이다. 정신을 집중해 보아도 그것을 투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자는 그때의 기분에 따라 악을 물리치는 무기, 자유와 해방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초대장, 어머어머한 재산, 용기와 에너지를 주는 약 등 여러가지 환상의 형태를 띠었다.
위기에 직면한 적도 있었다. 어느날 밤, 강도가 침입했을 때의 일이다. 칼로 위협당하며 남자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지금이야말로 상자를 열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상자는 잠근 책상 서랍 안에 있었다. 거기에 다가가려고 하는데, 상대가 먼저 그 낌새를 알아차렸다.
"어이, 그 서랍을 열어 봐. 뭔가 감춰둔 게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상자입니다."
속일 수가 없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강도는 서랍 안만 들여다보았을 뿐, 물러났다. 평범한 상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늙었다. 예전에 상자는 빛나는 미래의 상징이었다. 지금 상자는 그리운 추억의 그림자일 뿐이다. 젊었을 때는 열고 싶다는 충동이 지배적이었지만, 늙어버린 지금은 열지 말라는 자제 쪽이 지배적이다. 반면에 오히려 열어야 할 찬스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바램 또한 있다. 그러나 감동적인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열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일까.
남자는 아들을 위해서도 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회사를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열 마음은 들지 않는다. 한번의 기도 때문에 자신과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자는 병상에 있다.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남자는 지금 아무 저항 없이 상자를 열 수 있을 것 같다. 욕심도 없으며, 호기심도 없다, 지금까지 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도 없다. 상자가 무력하다고 해도, 원망할 마음도 없다.
만일 상자에 힘이 있어서 죽음의 공포를 얼마간 희석시켜주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 단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만은 견딜 수 없이 유감스러운 일이다.
남자는 베개 밑에서 상자를 꺼내 가만히 손을 대본다. 일생을 함께 한 상자이다. 자신의 육체의 일부, 아니 거의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동안 상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상자를 연다.
"뭐야. 너였어?"
기억은 유성처럼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상자 안에서 나타나 옆에 서 있는, 그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던 이국풍의 소년. 그 소년은 부드럽게 남자에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그때의."
"한 번 더 만나고 싶었어."
"상자를 열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체 너는 누구이고, 무엇을 내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니?"
"천사입니다. 천국으로 안내해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랬던 거냐?"
"함께 가시지요. 무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겠지. 내 생각도 같아. 이제부터는 네게 일임하겠어. 그런데 상자를 더 빨리 열었어야 했을까?"
"그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열지 않았고, 단지 그 뿐이지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네가 상자 안에 있으리라고는......."
남자는 베갯머리에 있는 시중 드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상자에 대해서 중얼거리고 있습니담나, 무슨 일이지요? 아무데도 상자 같은 건 없는데. 환각이나 망상이겠지요."
무엇이 망상인가.
상자는 줄곧 간직해왔고, 열어야 할 때 열었는데.
* 1926년 9월 6일 일본 도쿄도 출생. 동경 대학 농학부 농예화학과 졸업. 동대 대학원을 중퇴한 후에 제약회사에 입사. 회사를 그만둔 후, 1957년 SF동인지「우주진(宇宙塵)」에 발표한 "セキストラ(세키스토라)"가 <보석(寶石)>지에 연재되면서 작가로 데뷔. 처녀 단편집 <인조미인(人造美人;1961)>로 나오키(直木)상 수상. 1968년 <망상은행(妄想銀行)> 및 과거의 업적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장편(掌篇; 아주 짧은 단편소설)의 1인자로, 발표된 작품 수가 1000편이 넘는다. 일반적인 단편보다 훨씬 짧은 이 소설은 짧게는 200자 원고지 서너 장이 채 안 되는 작품까지 있을 정도.
일본의 대표적 SF작가 가운데 하나인 호시 신이치는 일본 SF 소설의 첫 장을 연 작가중 하나이며 일본 SF 작가 클럽의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무섹스, 무폭력, 무시사' 의 '3무(無)'를 내세우는 그의 작품은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그 아이의 상자/장락/ 권남희역',
작가에 대한 소개는 http://www.sfreaders.or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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