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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좋은 영화다. 지난 세기의 1986년에서 91년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여인이 살해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범인이 붙잡히지 않아 결말을 보지 못한 사건,그래서 잊어버린 숙제처럼 되어 있는 이 사건에서 이렇게 높은 감동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영화는 웃음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형사가 ‘딸딸이’라는 이름이 알맞은 경운기를 타고 등장하고,형사반장이 사건현장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고,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서울 형사가 강간범으로 오인되어 얻어터질 때 관객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애매한 혐의자를 경찰서 지하실에 잡아다 놓고 군화발로 짓이길 때까지도 이 웃음은 아직 관객들의 입가에 남아 있다.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는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그 몰골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이제는 강 건너 불이 되었으니 한바탕 웃음으로 넘겨 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애써 눌러두었던 우리의 상처가 그렇게 살았던 과거 속에서 솟아올라 생생하게 피를 흘리기 시작할 때,왜 그렇게 살아야 했던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객석은 비애와 분노의 감정에 휩싸인다.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야 할 거대한 악과 마주 섰던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 모두 패배의 이력을 하나씩 빈손에 움켜주고,고전비극을 보았을 때처럼 숙연한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된다. 그 끔찍한 범죄로부터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배웠다고 말해야 할까.
사실 우리의 80년대는 거대한 범죄로부터 시작했다. 이 5월만큼 아름다웠던 그 해의 5월에 광주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젊은 희망은 무참하게 꺾여버렸지만,공식적으로 그 범죄자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 범죄자들을 몰라서도 처단하지 못했고 알고도 처단하지 못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또한 그러하다. 한 시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꼬리를 감춘 악은 직접 희생을 당한 주민들과 수사관들,영화를 만든 사람들과 보는 사람들,그리고 우리 모두를 악에 바치게 만들고,시시로 우리 가슴을 후벼 생생한 상처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영화는 80년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이런 은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시대에 폭압적인 군사 권력이 실제의 수준에서도 이 끔찍한 연쇄살인사건과 어떻게 공모하고 있었는지를 밝힌다. 오직 백성을 겁주기 위한 등화관제훈련은 범인에게 안전하게 살인을 저지르도록 돕고,수사기록을 더듬는 수사관의 노력을 방해한다. 범죄를 감시하고 범인을 체포해야 할 경찰력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엉뚱한 곳에 배치된다. 게다가 문모 경관의 성추행 사건까지 끼어들어 결정적인 순간에 수사에 혼선을 빚게 만든다. 연쇄살인사건은 정치권력이 생산하는 일상의 공포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던 정황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드러내어 보여 준 것이라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 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권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 준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유신시대의 압제가,한국동란의 비극이,식민지시대의 몸부림이,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든 사회적이든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그래서 영화의 끝에서 전직 형사 박두만이 우리를 똑바로 쳐다볼 때,그 시선은 이런 질문을 쏘아 보낸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국민일보-200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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