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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5-11 02:28:57 / Hit:1355  

언어는 존재에 선행한다?

언젠가 한 외과의사가 신문칼럼에 쓴 글을 보았다. 보통 암세포가 자라려면 2-3년 정도가 걸린다. 그렇다면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은 이미 2-3년 전부터 암 환자였단 얘기가 된다. 그런데 2-3년 동안 멀쩡하게 지내왔던 사람이 선고만 받으면 다음날부터 환자로 돌변한다.

  국민학교(나는 초등학교는 다닌 적이 없다) 때 일이다. 반에서 물건이 자주 없어지자 선생(그 역시 국민학교 선생이었다)은 한 아이를 공개적으로 의심했다. 도난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선생은 그 애의 가방만을 뒤졌다. 짝은 아무 것도 없어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도둑맞았다고 거짓으로 말하곤 했다. 그러면 선생은 그 아이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애는 사생아였다. 사생아가 왜 나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뒤로 사생아라는 말을 들으면 두렵고 음침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마치 그 단어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아이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되어서였을까. 그 감정은 난생 처음 빨간 잡지를 보았을 때 느꼈던 화려한 죄책감을 닮아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내가 사생아이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날 양호실에 다녀오던 나는 텅 빈 교실(체육시간이었을 것이다)에서 그 애가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애를 화장실로 끌고 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하듯이. 그 애는 훔친 적 없다, 이르면 가만 두지 않겠다, 남의 일에 상관 마라,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등등 별별 말을 다 하더니 결국에는 사실을 실토했다. 넌 몰라, 난 어차피 의심받게 돼 있어, 어차피 도둑놈 소리 들을 거면 나한테도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냐. 정확한 대사는 기억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뜻의 말들이었다. 나는 무언가가 내 몸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듯한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조용히 선생이라는 작자들을 미워하기로 결심했을 뿐이었다. 나는 아직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색의 결들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선생을 증오함으로써 선생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했을 뿐이었다.

  언어는 존재에 선행한다? '이라크는 악의 세력이다'라는 부시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주위에서 집단의 시선이 한 존재를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몰아넣는 것을 심심찮게 본다. 언어란 표현의 도구이기보다는 폭력의 수단으로 쓰일 때가 더 많다는 생각도 그래서 해본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사생아인가? 선생을 증오하는 아이인가? 아직 누군가 선고해주지 않았을 뿐, 당신의 몸 속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존재는 언어에 선행한다. 다만 그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교실이, 당신과 나의 머리와 가슴속에, 뼈마디 마디마디에 깊숙이 숨어 있을 뿐.  그렇다면 당신은 언어가 존재에 선행한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가 언어에 선행한다고 말할 것인가? 혹 당신은 당신이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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