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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5-13 14:29:20 / Hit:1813  

'나무에게 듣는다.' 배호남의 시에 대해

나무에게 듣는다.




겨울, 눈내린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
적멸로 가는 입구 같다
나는 함부로 걸음 내딛지 못하고
키 큰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자신이 시작된 자리에 서서
삶을 통째로 견디는 나무들
그래서 이렇게 높고 곧은가

오갈 데 없는 희망이
나를 탕진했다
오래 길 위에 머물렀지만
나는 어디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종착을 모르는 소란스러운 발걸음아
네 마음 어디에 고요가 깃들 수 있을까
전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리며 내게 묻는다
나는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에 주저앉아
나지막이 지나온 날들을 더듬을 뿐이다

고개를 수그리고 일어나 걸음을 돌리다
그루터기에 새겨진 나이테를 본다
해마다 더해졌을 동심원들이
한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다
너 또한 경사진 마음이구나
한 자리에 오래 서서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여기 아닌
다른 어딘가로 마음 기울였던 흔적
핏물처럼 네 몸 속에 번져 있다
기울기의 간격이 해마다 넓어질수록
마음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다시 걸음을 돌려 숲길로 들어선다
쌓인 눈 밑의 얼음에는 잠시
몸을 휘청거려주면 된다


'나무에게 듣는다' 를 읽으면 좋습니다. 구석구석 잘 쓴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저도 이렇게 치밀한 서정을 만나면 기분도 좋고 작가에게 신뢰감도 가고 뭐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꾸 자꾸 읽다보면 어쩐지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지요. 정확히는 너무 아름답고, 너무 잘 쓴 것들이 꽉 차 있는 것이지요.
배호남의 시를 읽다보면 제 친구 일구 놈이 생각이 납니다. 그 친구는 열일곱부터 저와 같이 시를 쓰던 놈이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꽤 잘 썼었지요. 고등학교 때 쓴 시 중에 하나는 신춘 문예 최종심까지 올라갈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문제는 사실 너무 잘 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추어들이 보기에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시를 쓰는 것이지요. 아름답고 멋진 시. 세미나 같은 걸 하게 되면 구절구절 너무 잘 써서 별로 할 말을 없게 만드는 시.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아름다운 시, 혹은 좋은 시가 정말로 좋은 시냐는 것이지요. 저는 잘 쓴 시의 기준이 규정도 없이 혹은 이상한 방식으로 우리들 사이를 억압적으로 떠돌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춘 문예 당선 시로 인해서 혹은 몇몇 유명 시인들의 시풍에 의해서, 혹은 몇몇 비평가들의 취향에 의해서. 그런 이유에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문학판에 가도 뒤져보면 그 판에 대표 선수급 시인들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면 똑똑합니다. 시를 읽어보면 범상치 않은 습작의 이력을 가진 듯하고, 또 잘 쓴 것 같기도 합니다. 술도 잘 마시고 유머도 있고, 대한민국에 나오는 시인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뭐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시의 몸(?) 그 자체입니다. 네 그들은 시를 잘 씁니다. 하지만 고유하지는 않지요. 다른 말로 그들의 시는 모두 다르지만 그 시 속에 있는 서술자는 대체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유형, 무형의 어떤 것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좋은 시는 우선 자신에게 좋은 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맞는 것이어야 하고, 자신의 삶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그 시는 자신의 몸이어야 하고 자신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시의 이미지와 운율과 문체와 조사는 모두 그 시인의 개별적이고 독특한 몸을 표현하는 것이어야겠지요. 그래서 그 몸과 삶에서 무엇인가가 우러나왔을 때 비로써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말은 내공론과 육체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 한 명의 시인이라는 것은 세상의 나무와 달과 바람과 꽃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지요. "배호남의 시가 반드시 아름답고 멋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배호남의 시는 반드시 배호남다워야 한다."
저는 하나의 시가 그 시를 쓰는 시인에게, 혹은 독자에게 매순간 너는 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행위가 자신에게 새로운 시적 정의를 묻는 행위임과 동시에 그에 답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소설에 대한 소설 쓰기 혹은 시에 대한 시 쓰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소설이란 것은 그 소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형식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소설의 정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므로 그 내용을 가지고 다시 소설이 어쩌구 소설가가 어쩌구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시 혹은 잘 쓴 시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배호남의 칼라와 배호남의 이미지와 배호남의 호흡이 느껴지는 시.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내 보일만한 진정한 노래가 아닌가 합니다.
밑에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박도준의 시인데 저는 이 시에서 박도준 만의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상의없이 올리는 점 도준에게 사과하며...


비만인 박모씨


비만인 박모씨는 살이 살을 부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볼 안쪽 살을 꼭 깨문 채로 조깅을 한다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자 몸에 숨겨놓은 물결이 일렁거린다
박모씨, 사랑도 살이 데려 가버렸다고 생각한다 그의 몸 구석 어딘가에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그 어디에 그녀가 꼭 숨어있으리라 믿는다
자신의 몸 어디쯤 그녀의 손톱 자국이라도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디에 있니?
박모씨는 밤마다 불어난 자신의 젖통을 어루만지며 잠이 든다
자신을 태우면 며칠 밤을 밝히고도 남으리라 자학할 때면
하얀 피부 곳곳에서 땀이 쏟아진다
좁은 혈관 속에서 급하게 돌고 있는 피라도 좀 쏟아버려야 할텐데

박모씨는 자신의 알몸을 본 적이 없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 내 살은 감시당하고 있어
그는 그의 몸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숨막히는 살 속에 갇혀서
자신이 버려져야 할 쓰레기라고 느낀다

부피를 줄이려 할수록 더욱 커져만 가는 비만인 박모씨의 몸
그는 오늘 새벽에도
조깅을 하러 거리에 나왔다
그가 달리기 시작하자 그의 몸에 숨겨졌던 여러 겹의 밧줄이
바람에 의해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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