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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저씨, 혼자서도 참 재미있게 노시네.’ 강사는 혼자 신이 나서 벌써 30분 째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요지는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다'라는 얼토당토 않는 유전학적 결정론, 선민주의를 바탕으로, 적당히 남성우월주의, 성기중심주의의 음담패설이 섞여있는, '바야흐로 한국이 북한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 외계인들의 음모를 무찌르고 세계 최강국, 아니 우주 최강국이 되어야한다'는 배타적 국수주의, 민족지상주의, 지구인중심주의, 만세삼창주의, 만세! 만세! 만세! 정말 웬만하면 무슨 '주의'니 무슨 '론'이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저분껜 그런 것 백만 개쯤 가져다 붙여도 죄책감은커녕, 어딘지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이건 무슨 치매환자 재교육기관에서 수련회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말하기 능력이 가진 오토리버스 기능의 한계치를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인간의 뇌가 단순반복에 얼마 정도의 인내력을 가지며,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쥐가 나는가를 시험 당하는 마루타가 된 기분이었다.
통장이 심각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안 가면 벌금 30만원이야.” 30만원은 큰돈이다. 그 돈이면 신문사 보급소장이 신문을 구독하면 주겠다고 가져온, 12단 기어가 달린, 최신형 자전거도 너끈히 살 수 있다. 나는 그 자전거의 격조 있는 에메랄드 빛 광택에 마음을 빼앗겨 침을 꼴깍거리다, 민족지(?) 하나를 거의 구독할 뻔 했다. 아무튼, 30만원으로는, 아무리 레이스를 못해도 웬만한 포커 판에서 1시간 이상 버틸 수 있고, 담배를 스무 보루 정도 사서 바닥에 깔아놓고 그 위에서 담배걱정 없이 다섯 달 정도 잘 수도 있다.
“박OO씨!” “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대답했다. “박OO씨!” 대답소리를 못 들었는지 동사무소 아저씨가 재차 소리쳤다. “박OO씨, 어디 계세요? 손 들어보세요!” “네!” 나는 좀 더 큰 소리로 대답하며 손을 치켜들었다. “고개 좀 들어보세요.” 나는 쭈뼛거리며 모자챙을 더 내리고 고개를 조금 들었다. 동사무소 아저씨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부지 대신 나왔냐?” 민방위훈련 집합장소였던 초등학교 운동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숫기가 없던 나는 얼굴이 벌개졌고, 모자 속으로 숨고 싶었다.
당시 민방위훈련 대리출석은 그리 별난 일도 아니었다. 나 말고도 형제나 친구, 아버지의 민방위훈련 소집에 대신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어렸고 실제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는 것이다. 형들도 나빴다. 하지만, 그때 생각과는 달리, 아버지가 나빴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버지는 나가서 돈을 벌어 오셔야 했으니까. 원래 형들에게 하달된 대리출석 오더는 형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나에게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나이보다 조숙한 작은형이라면 괜찮았을 텐데. ‘씨, 아부진 별걸 다 시켜...’
베이지색이었다고 기억한다. 야구모자처럼 생기고, 베이지색 합성섬유로 되어 있었으며, 앞부분에는 동그란 비닐이 박음질되어 있었다. 그곳에 총천연색 삼각형 셋이 포개져있는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으니...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바로, 일년에 몇 번씩 모여, 전설적인 ‘등화관제 경기’ 등을 치러냈던, ‘민방위 팀’(?)의 로고였다. 관련된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난 모 그룹의 로고를 보면 민방위훈련이 생각난다. 하긴, 그 회사도 경제적으로 민방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어느 쪽에서 먼저 그 로고를 사용한 걸까?
민방위청장님 감사합니다. 제가 혹시 바르지 않은 호칭을 사용했더라도 용서하세요. 여하튼 해당 기관장님 감사합니다. 뭘 드셨는지, 넘치는 스태미나의 강사 아저씨는 아직도 떠들고 계시고, 나는 머리에 쥐가 나는 걸 막으려고 애써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다, 그 민방위 모자를 쓰지 않고 민방위훈련을 받게 해준 해당 기관과 기관장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천이 나일론 같은 합성섬유여서 땀 흡수가 안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존의 패션에 대한 개념,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깡그리 무시한, 용감한 모자였다. 한마디로 기능성과 미적 감각 모두를 과감히 배제한, 혁신적인 모자였던 것이다.
'10분간 휴식'이라는 말도 참 오랜만에 들어봤다. 밖에서 즉석 라면 한 그릇과 삶은 계란 하나로 못 먹은 점심 치레를 하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반쯤 남은 자판기 커피를 들고 다시 강당으로 돌아와 앉았다. 다음 강의는 화생방전 대처요령. 그래도 이번 건 좀 낫다. 갑자기 지하철에 불이 나거나, 사스가 더 지독한 변종을 만들고, 그놈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확산되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강사는 앞자리에서 졸고 있던 아저씨 세 명을 무대 위로 불러내 나란히 세워놓고, 여러 가지 방독면을 씌웠다. ‘쯧쯧... 그 아저씨들, 재수도 없지.’ 방독면을 쓴 아저씨들은 세 마리의 개미핥기 같았다.
‘저기다 민방위모자만 씌우면 딱 인데...’ 나는 그때까지도, 민방위훈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민방위 모자를 써야 한다는 구습을 과감히 철폐해준 민방위훈련 관련 기관과 기관장에게 가슴 깊이 감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 그런데 내가 왜 그런 것에 감사해 줘야하지?’ 인간은 참 놀랍도록 적응이 빠른 동물이다. 말도 안 되는 강의를 들으며 분해하던 내가, 어느새 민방위훈련을 받으면서도 민방위 모자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시시한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위안을 받으며 그 괴로운 시간을 다소나마 견딜만한 시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개쇼'를 본 적이 있는가? 언젠가 TV에서, ‘개쇼’를 본 적이 있다. 명절연휴특집 해외서커스 같은 프로그램이었다고 기억한다. 조련사의 신호에 따라, 여러 마리의 작은 개들이 수업시간을 흉내 내는 것이었는데, 개들이 앞발을 들고 질문을 하는가 하면, 딴 짓 하다 벌을 서는 등, 무척 우스워 보이는 장면들이 연달아 연출되었는데도, 나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개들의 눈동자가 자꾸 보였다. 칠판을 응시한 작은 눈동자들... 그 속에 공포가 있었다.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만들어진 질서에 자신을 맞추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종의, 틀림없는 공포가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원에서 바로 그 눈동자를 하고 앉아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내가 강당에서 그 눈동자를 하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민방위 모자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실에 행복해하며...
도대체 이놈의 나라, 살기 좋은 대한민국은 백성들에게 뭔 시키는 게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다 큰 어른들을 똥개 훈련시키는 것처럼 불러다 얌전히 앉혀놓고 뭐 하는 짓인가? 난 집을 나서기 전에 출력해간, 소설가 지망생 후배의 신작 원고가 아니었으면, 코 후비다 과다출혈로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 후배야, 고맙다. 핸드폰으로 '야옹~' 등의 정신병적 문자메시지나 날리다 손가락이 골절됐을 지도 모른다. 내 절박한 '야옹~'에 답해준 단 한 명의 친구에게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예비군훈련 받는 분들께, 더구나 그분들의 예비군 마크조차 한 없이 부럽기만 한, 전국 곳곳에서 박박 기고 계신 장병 여러분, 공익근무 여러분들께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근데, 그날이 올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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