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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달루시아의 뙤약볕 아래를 걷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떤 생각이 나면 일부러 그 생각을 멈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왜 영화를 만들려고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영화가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오지였다. 학교에 다니던 기간 내내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으로 시달린 나는 꽤 지쳐있었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황무지나 열대우림을 걸으며, 시간이 땀에 전 내 몸을 무표정하게 통과해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마존으로 가고 싶었지만 때마침 그때는 아마존의 우기였다. 나는 대신 스페인을 선택했고, 유적지를 빼면 모두 비슷한 얼굴을 한 대도시를 피해, 주로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의 시골마을들을 돌아다녔다.
나는 ‘알마그로’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서 맘씨 좋게 생긴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대뜸 나를 잡고 손짓, 발짓을 해가며 뭐라 뭐라 떠들더니, 내 소매를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할머니가 나를 해코지할 것 같지는 않아서 따라갔다. 좁은 골목을 몇 번 돌아 할머니는 어떤 집 앞에 멈추더니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집주인이 나왔는데 동양인이었다. 그 시골 마을에 동양인이라니! 그는 영어 단어 몇 개를 알고 있었고, 몇 마디 나누어보니 일본인이었다. 할머니는 시골 마을에서 보기 힘든 동양인을 보자, 그를 찾아왔다고 지레 짐작하고 나를 이끈 것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동양인인 나를 반가워했고, 나도 그가 반가웠다.
일본인의 이름은 ‘토시’였다. 토시는 좋은 사람이었고 우리는 친구가 됐다. 토시는 40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에, 160 센티미터가 채 안되는 키, 뻐드렁니가 입술 밖까지 튀어나온, 촉촉한 눈빛과 어색한 미소를 가진, 농부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우리는 이것저것 상대편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는 중학교 1학년 책에 나올만한 수준의 영어단어 몇 개와 손짓, 발짓, 그리고 표정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토시는 화가였다. 극사실주의 계열의 세밀화를 그렸는데 그렇게 인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토시는 생계를 위해 마을의 공회당, 술집, 이발소 등에 벽화나 문양도 그렸다. 토시는 나처럼 스페인을 떠돌다가 그 마을에 오게 됐고, 그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냥 눌러 살게 된 것이 15년 정도 된다고 했다.
토시는 내게 마을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나는 토시를 따라 마을의 광장, 오래된 성당, 투우장, 중세시대에 지어져 아직까지 사용되는 극장 등을 샅샅이 둘러봤다. 토시는 그때그때 자세한 설명과 그 마을 사람들만 알고 있는 야사를 말해주었다. 알마그로는 작은 마을이었고, 작은 마을들에서 흔히 그렇듯이, 사람들은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토시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타지 출신이었으며 화가였기 때문에 유명인사였다. 어디를 가나 인사를 주고받았고,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사람들은 나를 가족처럼 맞아주었다.
어느 날 저녁, 토시는 나를 이끌고 공회당으로 갔다. 말이 완전히 통하지 않으니 나는 도대체 토시가 어디로 가는지, 왜 내게 그곳을 보려주려는지 몰랐다. 나는 그저 중세의 유서 깊은 곳이겠거니 하고 따라갔다. 공회당에 다다르자 토시는 지하로 나를 이끌었다. 공회당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왠지 좀 으스스했다. 무슨 딱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니 눈앞이 탁 트이며 넓은 홀이 나타났고... 스무 명 가량의 아이들이 캐스터네츠를 딱딱거리며 흥겹게 민속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난데없는 풍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알 수 없는 희열에 차올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춤이 한 번 끝나고 토시는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줬다. 매주 한 번씩 그 마을의 고등학생들이 공회당에 모여 민속춤을 연습하는데, 토시는 내게 그걸 보여주려고 미리 허락을 얻어 나를 그 곳에 데려간 것이었다. 이내 나를 환영하는 춤판이 벌어졌다.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내가 사진 찍어주는 걸 좋아했다. 춤을 추면서도 사진기를 의식하며 예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모두 순진했고 해맑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미소와 동작들을 잡으려고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고 2통 넘게 사진을 찍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꼭 사진을 보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루의 끝은 언제나 술집 순례였다. 광장을 둘러싸고 여러 개의 바들이 있었는데, 아무 곳이나 하나를 잡아 들어가면, 반가운 인사와 포옹이 오가고,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술을 한 잔씩 샀다. 게다가 주인은 장사를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지 없는지, 같이 진탕 술을 마시다 걸핏하면 한 잔씩 공술을 돌리고, 푸짐한 공짜 안주를 내고, 그러다 또 다른 사람이 한 잔씩 샀다. 우리가 술을 사려고 하면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 아저씨 하나가, 몇 년 전 오랫동안 함께 살던 개가 죽은 후, 토시가 몇 달을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울며 지내던 얘기를 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흉내를 내며 거들었다. 바는 웃음바다가 됐고, 부끄러움이 많은 토시는 얼굴이 빨개졌다. 마을사람들이 토시를 놀리는 단골 레퍼토리인 것 같았다. 당시 토시는 마을사람들이 음식을 갖다 주고 위로해주어서 겨우 정신적 위기를 극복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다 다른 바로 들어가면 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거의 한 푼도 내지 않고 메뚜기처럼 바에서 바로 옮겨 다니며 밤새 포도주와 셰리주에 흠뻑 취했다.
며칠 후, 작별인사를 하는 토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토시에게 여유가 되면 꼭 다시 오겠다고, 적어준 주소로 꼭 편지와 사진을 보내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했다. 나는 알마그로를 떠나며, 나중에 영사기와 필름을 짊어지고 와서, 중세시대부터 내려온 마을 극장에 스크린을 걸어놓고, 토시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서, 내가 만든 영화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우리나라로 돌아와 영화를 만들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여태 한 편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모두 그렇듯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충은 알았지만, 영화 한 편 만드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나는, 이 땅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이, 실패하고 좌절했다가 다시 일어나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희망에 차올랐다가 다시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순간순간의 고비마다 스스로에게 다시 낡아빠진 질문을 하게 된다. 난 도대체 왜 영화를 만들려고 할까? 답은 여전히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그저 영화가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토시는 왜 알마그로에 눌러 살고 있었던 걸까? 아마도, 나처럼 ‘그저 알마그로가 좋아서’ 그러는 거겠지만, 다른 이유는 없는 걸까?
얼마 전, 10년 정도 알고 지내던 친구 하나가 직장을 그만뒀다. ‘어디론가 가지 않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가 그 이유였다. 친구는 유럽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스페인도 들르겠다며 내게 스페인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얘기를 하는 내내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사진들을 건네줬다. 사진들 속에서 알마그로의 아이들이 춤을 추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처음엔 영화를 준비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나중엔 너무 미안하고 창피스러워서, 사진들을 보내지 못했다. 이사를 하면서 토시가 적어준 주소까지 잃어버렸다. 나는 친구에게 가능하면 꼭 알마그로에 들러 토시에게 사진들을 전해달라고 말했다. 편지를 함께 보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부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 토시는 아직 알마그로에 살고 있을까? 그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됐겠지? 시골이니까 벌써 시집, 장가가서 엄마, 아빠가 된 녀석들도 있을 거야. 여행을 간다면 어디가 좋을까? 이번엔 정말 아마존으로 갈까? 토시가 원시부족들과 어울려 아마존 깊은 숲 속에 살고 있을 지도 모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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