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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겹쳐진 영화의 얼굴
- 최근 소설에 나타난 영화적 영향과 전망
1.
“그런데 그 친구 갈고리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순간, 마을의 빵집 앞에 앉아 있던 사내의, 새빨간 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두 발을 들고 떠다니던 주민들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나는 수화기를 떨구곤 허리를 굽힌 채 토하기 시작했다.
- 백민석, <이렇게 정원이 딸린 저택>
먼저, 소재의 선택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적 소재와 영화적 소재의 차이는 무엇일까? 소설과 영화가 활발하게 몸을 섞고 있는 지금, 그 변별점을 정확히 짚어내기는 쉽지 않다. 굳이 그것을 말해야 한다면, 우선 두 장르의 주된 전달방식의 차이에 눈을 돌려야 한다. 소설은 문자에 의한 서술과 묘사가 주된 전달의 수단이며, 영화는 시청각이미지가 주된 전달의 수단이다. 따라서, 문자에 의한 서술과 묘사가 효과적일 수 있는 소재, 이를테면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이야기는 좀 더 소설적인 소재라 할 수 있고, 시청각이미지가 효과적일 수 있는 소재, 이를테면 폭력, 섹스 등, 사물과 인물의 ‘운동’이 중요한 이야기는 좀 더 영화적인 소재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주류 수용자들, 즉 주류 독자나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두 장르 자체의 기의/개념/이미지다. 누군가 ‘이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아’라든가, ‘그 영화는 소설적이야’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의식 속에는 소설과 영화에 대한 각각의 기의/개념/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르들 자체에 대한 기의/개념/이미지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흥미로운 얘깃거리이지만, 이 글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지나가자.) 중요한 것은, 소설과 영화의 기의/개념/이미지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자본의 영향력이다. 독자나 관객들이 특정한 기의/개념/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데에는, ‘주류 소설’과 ‘주류 영화’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품으로 유통되는 소설과 영화의 주류는 자본의 생리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에 의해 ‘가장 훌륭한 소설상품, 영화상품’으로 인정되어 대규모로 재생산되는 소설과 영화가 채택하고 있는 소재는 서로 다르다. 자본의 영향력은 산업적으로 좀 더 부가가치가 높고 조직화된 영화에 있어 더욱 막대해서, 특정한 흥행공식을 만들어내고, 장르영화와 트랜드영화를 만들어내며, 폭력, 섹스 등 좀 더 자극적인 소재에 집착한다. 소설과 영화의 전달방식의 차이와, 자본이 선택적으로 생산한 결과 나타난 각 장르의 기의/개념/이미지의 차이는 이 글의 주제인, 소설에 나타나는 영화적 경향들을 얘기함에 있어, 편의상 소설적 특성과 영화적 특성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데 전반적으로 적용된다. 사실, 기의/개념/이미지의 차이도 근본적으로 전달방식의 차이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글에서 굳이 기의/개념/이미지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술에 있어 자본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의 당대적 중요성과, 현실적으로 그 동안 이러한 종류의 논의를 할 때 자본의 영향력이 간과되거나 생략되어 왔다는 저간의 사정을 고려한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글을 쓴 백민석은 대표적으로 영화적 소재를 즐겨 선택하고 있는 작가다. 그의 소설에는 시체, 유령 등이 자주 등장하고, 그것은 우리가 공포영화에서 흔히 보아왔던 것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시청각이미지가 선명하고 자극적이다.
소설 속에 나타나는 영화의 영향에서 작품의 분위기도 빼 놓을 수 없다. 여기서 분위기란 작품 전반에 흐르는 빛깔과 맛을 말하는 것이다. 분위기는 작품에 있어 대단한 중요한 요소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떤 분위기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톤이 달라지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보다는 영화에서, 그것도 주로 장르영화에서 빈번히 보아오던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깔려 있은 소설을 발견하는 일이 요즘 들어 잦아졌다. 백민석의 작품은 공포영화의 분위기를 연상시키고, 박민규의 작품은 B급 영화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서사의 전개방식에도 영화의 영향이 보인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주로 사건의 배치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특징 중 하나가 시간을 일정한 단위로 분리해낸 뒤, 재조합한다는 데 있다. 미시적으로 보자면,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영화의 운동들도 사실 1초에 24개의 프레임이 연속해서 보임으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착각이다. 각각의 프레임에는 1/24초의 분리된 시간이 기록되어있다. 좀 더 시각을 넓혀 보면, 영화가 완성되기 전까지 촬영된 각 신과 시퀀스들은 분리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나중에 따로 질서를 부여하는 ‘편집’작업을 통해 비로소 서사를 얻게 된다.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영화 생산자들이 일단 분리된 시간들, 사건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이 꼭 자연계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배반함으로써 최대한 긴장감과 의혹, 궁금증을 만들어내서, 마치 애정결핍증의 아이처럼 관객들의 시선을 붙들어두려 한다. 최근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이현은 다양한 영화적 서술방식이 녹아있는 소설들을 보여주고 있다. <트렁크>라는 작품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간을 소제목으로 한, 여러 개의 단위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소제목들을 배열해 보자. 토요일 오후 네 시 - 한 달 전 - 금요일 오전 여섯 시 - 금요일 오후 여섯 시 - 토요일 오후 다섯 시 ……. 소설 속의 시간은 토요일에서 시작해서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하루 전으로, 그리고 나서야 처음 시간의 다음으로 돌아와 흘러간다. 영화처럼 시간이 분리되어 편집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전개방식은 이제 소설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꽤 보편화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스테인리스의 신문 투입구를 들어올리자 안에 또 다른 덮개가 나타난다. 덮개를 밀치자 엽서만한 사각 구멍 속으로 507호의 현관이 들여다보인다. 시멘트 바닥에 닿은 한쪽 뺨이 시리다. 현관에 가지런하게 벗어 놓은 비닐 실내화가 보인다. 겨자색의 발등 덮개 위에 조잡한 바느질로 꽃이 수놓인 실내화다. 투입구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바닥을 더듬거린다. 실내화는 손에 닿지 않는다...
- 하성란, <곰팡이 꽃>
우리가 가장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 문체다. 위에 인용한 하성란의 작품은 단문 위주의 속도감 있고, 감정과 설명을 배제한 시각적 묘사를 중심으로 하며, 시선에 있어서도 일정한 동선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이미지 몽타주나 팬 기법과 흡사하다. 이러한 감정과 설명을 배제한 묘사 중심의 문체는 상대적으로 빈도는 낮지만, 몇 년 전부터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사건과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에 관한 것이다. 영화적 사건과 그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은 뭔가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 싸우거나, 쫓기거나, 섹스를 하거나, 근사하거나, 예뻐야 한다. 사실, 그런 것들은 현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기왕 ‘돈 내고’ 극장에 가는 관객들은 그런 볼거리를 찾기 마련이고, 영화 자본은 그런 관객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좀 더 격렬한 격투신과, 좀 더 속도감 있는 추격신과, 좀 더 자극적인 섹스신을, 좀 더 근사한 곳에서, 좀 더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을 통해 연출한다. 소설에 녹아든 예를 살펴보자. 김영하의 <비상구>를 보면, 인물들은 자동차로 자유로를 질주하거나, 대형 할인 매장에서 여자애를 태운 쇼핑카트를 ‘탱크처럼’ 밀고 가거나, 여관 침대 위에서 음모를 밀거나, 택시기사와 추격전을 벌인다. 영화로 보더라도 자극적인 사건들이며, 흥미로운 세팅이고, 좋은 세트와 로케이션이다.
영화의 세부적인 기법들이 소설에 녹아드는 경우도 잦아졌다. 앞서 언급한 정이현은 그의 다른 작품,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도 작은 단위들에 소제목을 붙여 묶어놓고 있는데, 그 소제목들이 흥미롭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유리, 같은 것’, ‘유리의 성’이 그것들이다. 특히, 세 번째 부분인 ‘유리의 성’에는 돈 많고 괜찮은 남자를 꼬이기 위한 십계명이 설명되어 있는데, 각각의 항목에도 소제목이 붙어있다. ‘一. 샤워는 혼자서, 남자보다 먼저 해라’, ‘二. 속옷 선택에 신중해라’, ‘三. 머리를 촉촉하게 적셔라’ 따위다. 모두 영화의 자막을 직접적으로 연상케 한다. 이것 외에도 요즘 소설 속에서 클로즈업, 점프컷, 페이드인/아웃, 디졸브(이중노출)를 보는 일은 흔해졌다.
2.
소설 속에서 영화적 표현방식이 눈에 띈다고 해서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소설과 영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영화의 측면에서 보면, 그 영향은 더욱 전면적이다. 영화서사에서 소설의 영향 ‘아닌’ 것을 찾는 일이, 소설의 영향인 것들을 찾는 일보다 쉽다. 소설과 영화가 몸을 섞는 일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 영화의 탄생 이후 1세기 넘게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그 예를 찾는 일은 ‘누워서 비디오 보기’보다 쉽다. 영화라는 놈이 워낙 혈통이 의심스럽다 보니 생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놈을 키운 8할이 소설이었고, 그래서 소설의 ‘양아들’ 쯤 된다는 건 확실하다. (영향을 주고받는 건 나이나 촌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제임스 조이스가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더블린에서 볼타극장(Volta Theatre)을 운영했으며, <젊의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즈> 등 그의 작품에서 영화적 몽타주기법과 유사한 서술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30년대 작품인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이미 사건의 역순배치와 편집, 마치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처럼 발언하는 논평적 화자를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영화적 영향에 대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최근 들어 문학작품에서 영화적 영향이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양적으로 많아지고 수적으로 빈번해진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앞에서 요즘 소설에 나타난 대표적인 영화적 영향 몇 가지를 지적했는데, 그 설명은 어쩔 수 없이 ‘작가가(주체) 소설을(객체) 이러이러하게(방법) 썼다(행위)’는 식의, 일종의 ‘묘사’에 기초하고 있다. 즉, 작가가 주체가 되는 행위라는 암묵적 뉘앙스를 가지게 되었는데, 위의 질문에 보다 분명히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 뉘앙스가 수정되어야 한다. 영화적 영향이 문학작품 속에서 더 빈번해진 이유는 작가보다는 수용자인 독자이자 관객에게서 먼저 찾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문화적 경험까지를 포함해서)의 총체를 바탕으로 작품을 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경험’의 과정에서 작가도 한 명의 독자요 관객일 뿐이다. 이렇게 수용자에게 주목할 때, 비로소 특정한 주류 소설상품, 영화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의 실체에 가까워진다. 자본은 ‘돈이 더 벌리기 때문에’ 주류영화를 주류영화의 방식으로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을 보며 수용자들은 일정한 영향을 받고, 주류 수용자를 형성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한 기호와 취향을 가지게 되며, 그 기호와 취향에 따라 다른 소설상품, 영화상품을 구매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기호와 취향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자본은 지속적으로 수용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자극의 강도를 높여간다. 1903년 에드윈 S. 포터의 <대열차강도>가 개봉되었을 때는, 화면에 강도가 나타나면 실신하는 관객들이 속출했지만, 이제는 김기덕의 한국영화 <섬>에서 여성 성기에 넣어진 낚시 바늘을 잡아당기는 장면이 나와도 물 건너 심약한 여성 관객이나 한두 명 기절할 뿐이다. 자본의 일방적 논리를 견제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적 개입의 불가피성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최근 들어 소설에서 영화적 영향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를 보며 의식세계를 형성해온 주류 수용자들이 그 기호와 취향을 문학상품의 구매에 있어서도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존 소위 ‘순수’문학의 상업적 퇴조와 무협이나 판타지, SF, 인터넷 소설의 인기가 그 증거들 중 하나다. 작금의 문화자본의 작동 메커니즘, 문화소비의 메커니즘이 문학, 영화 등 각 예술장르에 미치는 영향을 좀 더 자세히 알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 공적 개입의 필요성 뿐 아니라 폭과 방식을 정확히 산출하기 위해서는, 수용자를 중심으로 자본의 영향력과 역할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 문학 쪽에서는 무협이나 판타지 등의 장르문학에 대한 전반적 연구가 시급하다. 그래야 이런 종류의 논의가 좀 더 분명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사실 이 글에서 비교하고 있는 소설과 영화는 올바른 쌍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소위 ‘순수’소설과 주류 영화를 비교하는 사기를 미필적 고의로 저지르고 있다.
3.
글 쓰는 이들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영화의 방법을 가져다 쓰든 전략시뮬레이션게임의 방법을 가져다 쓰든, 형식의 부분적 변화 자체가 작품의 질 자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설과 영화, 연극 등 예술장르를 막론하고, 진정한 서사적 감동은 어떻게 가능할까? 서사적 감동은 형식이 유기적 전체성을 가지고 인간의 의식 속에 파편화되어있던 모종의 진실을 결합해 내용으로서 형상화해낼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언어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언어의 영역이고, 바로 문학의 전공분야이며, 그래서 문학은 모든 서사 예술의 맏형이고 양아버지인 것이며, 그래서 글 쓰는 이들은 그것을 움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세기 초, 영화의 표현방식을 확립한 두 명의 선각자 중 한 명이고, <국가의 탄생>, <인톨러런스> 등을 만든 미국감독 D. W. 그리피스는, 지금은 영화문법의 기본일 뿐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학에까지 사용되는 몽타주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해 편집한 필름을 보며 제작자들과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제작자 그런 도약을 하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겠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겁니다.
그리피스 하지만, 디킨스도 똑같은 식으로 쓰지 않았습니까?
제작자 (답답한 듯) 그야 그렇지만, 그건 소설 쓰는 디킨스였습니다.
소설은 그렇게 쓰지요. 하지만 영화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피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란 영상 이야기일 뿐입니다.
(확신에 찬 눈빛)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지구의 반대편 소련, 나머지 한 명의 선각자이며, 몽타주 기법을 정교화하고 <전함 포템킨> 등을 만든 S. M. 에이젠슈테인도 몽타주기법의 기원을 디킨스, 푸슈킨, 플로베르, 졸라에서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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