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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니컬 시네마>
색(color) - <태극기 휘날리며>를 중심으로
좋은 영화, 완성도 높은 영화란 무엇일까? 의미 있는 이야기를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에 담아낸 영화일까? 미안하지만 그건 좋은 소설의 조건은 될 수 있겠지만, 좋은 영화의 조건으로는 부족하다. 영화가 영화이기 위해서는 특정하게 ‘보이’고 ‘들리’기 때문이고, 그렇게 특정하게 보이고 들리게끔 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기술이 필요하다. 태생적으로 영화라는 예술 장르는 현대 과학기술의 부산물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응용하여 영화적 표현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따라서 앞서 말한 조건에, ‘영화적 표현 기술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영화’라는 조건까지 충족시켜야 좋은 영화, 완성도 높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기술적인 면은 그동안 영화의 분석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져 온 게 사실이다. 새롭게 시작될 이 칼럼에서는 영화의 표현 기술, 영화적 테크닉을 중심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할 예정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기본적인 영화적 테크닉을 이해하게 된다면, 영화보기가 더 풍요롭고 즐거워질 것이다.
빛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태양광선도 있고 백열등도 있고 형광등도 있고 그 외에도 무수히 다양한 종류의 빛이 있다. 각각 다른 빛의 성질을 과학적으로 수치화한 것이 ‘색온도’(color temperature)다. 색온도는 무수히 넓은 분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특정한 필름에 재현되는 색감도 조금씩 달라진다. 이것을 예측하고 인공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영화의 색이 만들어진다. 영화의 색은 크게 앰버(amber, 오렌지색과 비슷)계열과 블루계열로 나뉜다. 색온도가 낮을수록 점점 더 짙은 앰버톤이 되고, 색온도가 높을수록 점점 더 짙은 블루톤이 된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어떤 색이, 어떤 의도에서, 어떤 방법으로 사용되었을까? 우선,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두 장면을 묶어서 보는 이유는 둘 다 현실을 그린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색의 조작 없이 최대한 깨끗하고 선명해 보이도록 찍었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첫 장면은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이고 마지막 장면은 전체적으로 밝아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첫 장면은 유해 발굴 장면이다. 무겁고 경건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약간 어둡고 콘트라스트(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차이)를 크게 해서 그늘진 부분의 어두움을 강조했다. 마지막 장면은 과거의 회상이 끝나고 진석이 진태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과거의 비극과 슬픔이 폭발하는 장면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런 감정들이 모두 정화되어 깨끗한 상태로 되돌려지는 장면이다. 따라서, 콘트라스트를 작게 하고, 전체적으로 밝고 깨끗하게 찍었다.
첫 장면 끝에서 진석은 진태가 만들다 만 구두를 꺼내고, 구두가 클로즈업 된다. 그리고는 전쟁 전의 행복한 형제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한 테크닉이다. 내용상으로도 구두는 진석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게 하는 물건일 뿐만 아니라, 구두의 브라운색이 현실장면에서의 자연색과 다음 장면의 밝은 앰버톤을 연결시켜주는 색의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구두는 사건의 흐름과 색을 동시에 연결시켜주는 완벽한 소품으로 활용된 것이다. 감각적인 방법이다.
그 다음부터 진석이 부상을 입고 후방병원에 있는 장면 전까지는 일관성 있는 색의 진행을 보여준다. 밝고 짙은 앰버톤에서 시작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앰버톤이 점점 빠지고 색 자체의 농도도 점점 엷어진다. 여기에서 고려된 것은 역사적 배경, 계절, 영화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50년대라는 역사적 배경이 앰버톤으로 일련의 회상 장면을 시작하는 이유다. 앰버톤은 마치 옛날 사진을 보는 듯한 오래된 느낌 주기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도 회상장면에 많이 쓰인다. 흔히 말하는 ‘세피아톤’도 같은 계열이다. 또, 따뜻한 느낌을 주는 앰버톤은 형제의 행복감을 표현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필자는 전쟁이 시작되고 전쟁신이 나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의 할리우드 전쟁영화에서처럼 블루톤이 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짐작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낮 장면에서 앰버톤은 지속된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할리우드적이면서 할리우드와 다른, 한국적인 부분이다. 6월에 시작된 전쟁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 겨울이 되어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다가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계절이 여름-가을-겨울로 바뀌는 동안, 앰버톤는 조금씩 빠진다. 또, 마치 색깔이 천천히 씻겨 나가듯이 채도도 조금씩 낮아져서 겨울의 차가운 느낌이 된다. 채도를 낮추는 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 호크 다운> <밴드 오브 브라더스>(TV 미니시리즈) 등의 할리우드 전쟁영화에서 전장의 삭막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애용하는 방법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내용도 진태가 훈장을 타기 위해 점점 전쟁에 빠져들어 비인간적이 되어 가는데, 이 느낌을 표현하는 데도 성공적인 방법이었다. 진태가 포로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장면의 차갑고 창백한 톤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지루한 전쟁의 끝 무렵, 부상을 입고 후방병원에 있는 진석 장면은 풀어진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채도는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앰버톤은 없고 대신, 부드러운 느낌을 살렸다. 이 장면에서 이어진 마지막 전투 장면의 특징은 전체적으로 어둡다는 것이다. 낮 장면인데도 자욱한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배우들의 얼굴분장, 전장의 흙 빛깔도 어둡게 처리되어서, 전체적으로 칙칙하고 더러운 느낌이다. 진태의 비극적 최후와 전쟁의 추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런 느낌을 살리기 위해 연기를 뿜어내는 장비 뿐 아니라, 분장팀, 미술팀이 총동원되었다. 이 장면의 마지막 컷인, 쪼그린 채 죽은 진태의 시신 컷과 현실에서의 진태의 유골 컷은 오버랩으로 연결된다. 내용적 연결뿐만 아니라, 색의 연결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마지막 오열장면은 밝고 깨끗한 현실의 색으로, 바로 전 장면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전 대부분의 한국영화들과는 ‘때깔’이 다른 영화이고,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를 한 뼘 이상 높여준 완성도 높은 영화이며, 그래서 아름답고 고마운 영화다. 제작기간 동안 고통을 참으며 각자의 분야에서 헌신했을 모든 스탭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
<홍경표 촬영감독 인터뷰>
문) <태극기 휘날리며>의 색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었나?
답) 계절, 영화의 내용과 느낌을 총체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비교적 진한 앰버톤과 높은 채도로 시작해서 앰버톤과 채도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으로 설정했고요.
문) 어떻게 준비했나?
답) 촬영에 들어가기 전 충분한 기간에 걸쳐,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원하는 느낌의 색을 만들 수 있을지를 필름의 선택에서부터 촬영, 현상까지를 모두 충분히 테스트했고, 그 결과를 보고 결정했습니다. 귀찮고 지난한 과정이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하나하나 직접 해보고 결정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죠.
문) 구체적으로 사용된 테크닉은?
답) 색과 콘트라스트, 채도를 조정하는 것은 주로 디지털 색보정을 통해 스킨톤을 위주로 잡았습니다. 물론, 분장팀과 미술팀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특히, 마지막 두밀령 전투 씬에서 분장팀, 미술팀, 제작부의 역할이 컸어요. 처음과 마지막의 현실장면은 모두 자연색으로 갔고, 깨끗하게 찍으려는 생각이었는데 마침 날씨가 흐려 도움이 됐습니다. 첫 장면은 아무래도 무거운 분위기라 콘트라스트를 높이고 약간 어둡게, 마지막 장면은 ‘씻김굿’과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콘트라스트를 줄이고 밝게 찍었습니다. 회상장면으로 넘어갈 때의 구두 클로즈업은... 현장에서 보니까 구두가 브라운색이더라고요. 그때 색을 연결시키는 ‘트랜지션(연결) 샷’으로 쓸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클로즈업을 들어갔죠.
문) 참고한 외국영화가 있다면?
답)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 <윈드 토커> <밴드 오브 브라더스> <블랙 호크 다운> <풀 메탈 자켓> <씬 레드 라인> <위 워 솔저스> 등 지금까지 나온 거의 모든 전쟁영화를 보았고 참고했습니다. 그 영화들을 보면서 ‘적어도 저 정도 수준은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떻게 한국적인 전쟁영화를 찍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문) 한국의 제작환경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답) 현상소죠. 시사실 등의 시설도 아쉬움이 많고, 특정한 효과를 뽑아내기 위한 데이터도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전문적인 인력이 부족하죠. 현상소 자체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고 생각합니다.
문) 할리우드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면?
답) (웃음) 가야죠. 한국영화를 발전시키는데 자극제가 되고, 박찬호처럼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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