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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니컬 시네마>
“진리를 찾는 자, 고통과 열정이 그대의 것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를 증언하러 세상에 왔다고 말하는 예수에게 빌라도는 되묻는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대사 중에서 필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바로, ‘진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베리타스(veritas)’였다. 라틴어는 거의 모든 유럽 언어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베리타스’도 거의 모든 유럽 언어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불어의 ‘베리떼(vérité)’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유명한 기록영화운동 사조, ‘시네마 베리떼’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 계열 영화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궁극적으로 진실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일까? 그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철학의 오랜 논쟁거리이며, 인생관,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되는 것들이다. 필자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도 이 문제들과 관계가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명이다. 감독인 멜 깁슨이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생각과 느낌의 많은 부분이 조명 효과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조명에 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예수의 일생을 다룬 중세 회화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영화가 생겨나기 이전, 압도적인 시각 매체였던 회화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소재가 예수의 일생이다. 얼마나 많이 다루어졌느냐 하면, 신약성경에 묘사된 예수의 모든 행적을 영화적인 컷으로 전부 분할(충무로에서는 ‘배 짼다’는 과격한 표현을 쓴다)해서 본다고 해도, 회화에서 그려지지 않은 컷을 찾아내기가 힘들 정도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그리고 있는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2천년동안 그 많은 화가들이 쉬지 않고 그려댔으니 오죽하겠는가? 각 컷마다 걸작에서 졸작까지, 대가의 작품에서 목동의 낙서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버전들이 그려졌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는 내내, 장면마다 어느 중세 회화에서 본 듯한 구도와 터치라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마치 바로크회화 전집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필자가 특히 영향이 두드러진다고 생각한 화가들은 카라바지오, 렘브란트, 고야, 들라크루아, 엘 그레코 등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일종의 ‘시험’을 보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참고서’들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켠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들 뿐 아니라, 회화, 사진, 다큐멘터리 등 모든 시각 매체가 그 ‘참고서’들이다. 미리 공부하고, 필요하다면 거기 나온 방법들을 써먹으려는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만든 사람들은 ‘참고서’들이 너무 많아 고민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그 수많은 그림들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한꺼번에 떠올렸을 테니 말이다. 그런 혼란은 정리되지 못한 채 영화 속에서 불규칙적인 패턴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렘브란트가 서있는가 싶더니 흉물스런 몰골을 한 고야의 괴물들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그리고 영화 전편에 걸쳐, 열정을 잃은 카라바지오의 유령이 차가운 냉기를 뿜으며 배회한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09)는 서양미술사에서 몇 마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화가다. 필자가 미술사학자는 아니지만, 아마추어적인 무모함이 용서된다면, 그의 미술사적 의미를 두 가지로 요약하고 싶다. 첫째, 그는 성서의 등장인물들을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촌뜨기 같은 성 토마가 속물스런 표정으로, 부활한 예수의 구멍 난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장면을 그린 <의심하는 토마>나, 죽은 성모마리아를 로마 강변에서 건진 시체를 모델로, 퉁퉁 붓고 푸르뎅뎅한 살덩이로 그려낸 <성모의 죽음>은 악명 높다.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 이런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예수가 지상에 와서 죽임을 당한 이유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못나고 비루한 사람들까지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었다. 또, 예수, 성모마리아, 성인들도 지상에 있는 동안은 그들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둘째, 카라바지오는 빛을 재발견했다. 그는 다른 화가들처럼 인체를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부드러운 빛을 사용하는 대신,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기 위해 콘트라스트가 강한 극적인 빛을 사용했다.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형상들 뿐 아니라 생각까지를, 빛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카라바지오를 ‘자연주의자’라고 불렀다. 당시의 예술가에게 ‘자연주의자’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였고 최악의 비난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거의 모든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필자는 그의 작품이 가진 에너지의 근원을 그의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카라바지오는 성격장애자에 가까웠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사소한 일로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적도 있으며 여러 번 감옥에도 드나들었다. 예술가에게 ‘양날의 칼’과도 같은 이런 성격을, 하층민의 구원에 대한 열정, 예술에 대한, ‘궁극적 옳음’을 찾기 위한 열정으로 불사르지 않았다면 그의 걸작들도 없었을 것이다. ‘패션(passion)’은 ‘열정’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모두 원래의 의미, ‘고통’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열정은 고통의 동의어다. 카라바지오가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감독, 멜 깁슨은 공공연히 카라바지오의 스타일을 가져왔다고 밝혔다. 카라바지오처럼 멜 깁슨은 콘트라스트가 강한 조명을 사용해서 십자가형의 집행과정을 끔찍하리만치 낱낱이 그려냈다. 전체 분량의 40% 정도를 인공조명으로 찍은 이유도 자연광보다는 인공조명으로 그런 조명 효과를 만들어내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카라바지오 작품 급의 걸작이 되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카라바지오의 반대유파였던 카라치의 작품에서처럼, 멜 깁슨의 예수와 마리아는 ‘대사빨’에서 여전히 고결하고 진부한 광채를 뿜어내고, 카라바지오보다 훨씬 나중에 정반대의 길을 간 고야의 작품에서처럼, 멜 깁슨의 ‘당대적 현실’에서는 온갖 잡스러운 환상과 이분법의 악마까지 우글거린다. 멜 깁슨이여, 현실을 알고 싶은가? 이라크 팔루자에서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수천 명이 비명도 못 지르고 넝마처럼 찢기는 게 현실이다. 결국, 멜 깁슨이 벤치마킹한 것은 소재적 선정성과 아무런 고통도, 열정도 없이 차갑게 죽은 카라바지오의 퉁퉁 붓고 푸르뎅뎅한 시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필자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 관해서다. 시네마 베리떼의 작가들이 이미 반세기 전에 고민했던 케케묵은 문제에 관해서다. 바로, 진리에 관한 문제들 중 사소한 일부분인, ‘진리를 어떻게 영화 속에 담아낼 것인가’의 문제다. 시네마 베리떼의 작가들은 인공조명을 배제한 들고찍기를 선택했다. 진리는 정말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가 있다 해도, 영화는 애초부터 진리를 표현할 수 없는 장르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는 자, 영화계를 떠나라! 그래도 영화 속에 진리를 그리고자 하는 자, 고통과 열정이 그대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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