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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4 14:50:38 / Hit:1316  

파이널 스코어 5월 셋째주 원고

파이널 스코어 - 63



  탄핵이 기각됐다. 지난 5월 14일 오전 10시부터 전 세계에 생방송된 탄핵심판 선고에서 헌법재판소는 ‘부분적인 법률위반은 인정되나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하지 않으므로 기각한다’는 요지의 결정문을 발표했다. 이로써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는 일단락됐다. 이번 주 파이널 스코어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사실상 대통령 없이 살아야 했던 날수인 63이다.

  이번 탄핵사태 63일은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우선, 국가권력과 법질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높이를 낮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회 탄핵안가결 직후인 3월 넷째 주 본 칼럼에서 필자는 ‘대통령 없는 나라라고 무단횡단하거나 차선위반하지 말’라고 썼는데, 그런 위선적인 표현이 나온 배경에 대해 고백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내려진 마당에, 필자도 어두운 과거를 고백하고 겸허히 독자들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4일 밤 12시경, 필자와 일행은 맥주 5병 정도를 나누어 마시고 2차를 위해 자리를 옮기던 중, 일요일 심야에 차량통행이 한산한 틈을 타 무단횡단을 감행했는데, 해당지역 유흥가를 뻔질나게 드나들어 인근의 지형지물, 병력배치상황을 잘 알고 있던 소설가 김모 후배가 ‘경찰이 그곳에서 가끔씩 단속을 하니 경계가 요망된다’는 발언을 했고, 이 발언에 대해 평소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되어왔던 연극인 권모 선배가 ‘에이, 대통령도 없는 나란데, 어때?’라고 자의적 기각결정을 내리며 작전을 독려했던 것이다. 필자, 선배의 그 발언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대통령의 권위도 그토록 쉽게 위협받는데 한갓 경범죄를 단속하는 경찰의 권위에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있겠는가? 필자는 이후 더욱 고무되어 운전을 하면서도 주관적 신호해석과 과감한 끼어들기로 현행법질서를 심히 문란케 하면서도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달콤한 모럴 해저드에 빠져들었다.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당시 탄핵사태에 정신적 충격을 받고 잠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던 것 같다.

  필자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보면서 비로소 반성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부수를 자랑하는 유력 잡지에 칼럼을 쓰는 공인으로서 언행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위선적인 표현을 쓴 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잡지사상 초유의 ‘칼럼니스트 탄핵사태’가 오더라도 독자들의 뜻에 겸허히 따를 것을 약속한다. 다만, 세상의 모든 돈이 자신의 결혼식 축의금이라고 생각하는 전모씨의 아들 전모씨와는 달리, 필자는 개전의 정이 뚜렷하니 선처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필자의 작태와는 별개로, 이번 탄핵사태가 국민들이 국가권력과 법질서를 친근하게(?) 느끼게 해서 탈권위시대를 앞당기는 데에 기여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탄핵사태가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한 단계 발전시킨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 달 쯤 전, 필자는 친구네 가족들과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러 카페에 갔다. 초등학교 1학년인 친구의 아들 녀석은 어른들처럼 커피를 주문하려다 아빠의 강력한 태클이 들어오자 삐쳐서 소리쳤다. “아빠, 탄핵이야!”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탄핵’과 같은 어려운 정치용어를 실생활 속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선 전적으로 탄핵주도 국회의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 사건 이후, 필자도 이번 어린이날 조카들에게 ‘탄핵’ 당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탄핵사태는 국민들에게 살아있는 민주주의 교육의 장을 열어주었다. 더 이상 국민들이 부당한 권력에 두려움을 느끼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

  탄핵이 기각됐다. 이번 헌법재판소 탄핵기각 결정의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사회적 합리성과 국민들의 희망을 복원해냈다는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박관용 국회의장님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떠오른다. “사필귀정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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