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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리를 사랑해
I love cherry ball
나 자신보다도 더
better than I love myself
그녀는 그걸 알고서 날 사랑하지 않아...
She gets so she don't love me...
- <체리볼 블루스(Cherry Ball Blues)>, 스킵 제임스(Skip James)
시는 시집 속에 없다.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다. 시는 생활의 한숨 속에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실려 있다. 위에 인용해놓은 블루스가수 스킵 제임스의 노래가사를 보라. 시인은 체리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체리는 얼마나 육감적인 과일인가? 그 붉은 빛깔이며 구슬처럼 탐스런 모양, 입안에 넣고 깨물 때의 짜릿함과 툭 터져 입안 가득 번지는 새콤달콤한 맛을 떠올려보라. 그래서 필자도 체리를 좋아하고 독자 여러분들도 체리를 좋아한다. 이런, 시인은 체리를 너무 좋아해서 ‘사랑한다’고까지 표현한 모양이다. 게다가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한다니, 그 너스레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체리 맛처럼 가벼운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여기서 드라마틱한 시적 반전이 일어난다. 시인은 갑작스레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그걸 알고서 날 사랑하지 않아” 아, 그런 게 아니었다. 시인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연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시인은 좌절했고 상처를 받았고, 시인의 극심한 고통은 자기혐오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앞의 내용은 전면적으로 재해석된다. 시인이 자기 자신보다 체리를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정말 체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체리만큼도 사랑하지 않는다, 혐오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체리는 하잘 것 없는 과일 체리인 동시에,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연인이다. 시인이 노래하고자 한 것은 체리의 달콤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육감적인 체리의 쓰디 쓴 고통이다. 필자는 최근에 이렇게 미학적 현기증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시를 읽어보지 못했다.
노래는 앨범 속에 없다.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다. 노래는 생활의 소음 속에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찰랑이는 물결소리에 실려 있다.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영화 <더 블루스 : 소울 오브 맨>은 바로 그런 노래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는 <택시 드라이버>로 유명한 마틴 스콜세지가 기획, 제작한 블루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7부작 중 첫 번째 영화다. 열렬한 음악광이며 이미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등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빔 벤더스는 능숙한 방법으로 세 명의 블루스 거장들과 그들의 음악을 소개한다.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y Johnson, 이하 블라인드 윌리) 스킵 제임스(Skip James, 이하 스킵) J.B. 르누아르 (J.B. Lenoir, 이하 J.B.)가 그들이다. 이 글은 <더 블루스>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후반부 10분에 바치는 헌사다.
<더 블루스>가 세 명 예술가의 음악을 소개하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영화의 ‘몽타주’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몽타주는 원래 ‘짜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불어다. 범죄수사에서 눈, 코, 입 등 범인들의 얼굴 각 부분을 짜 맞춰 전체적인 얼굴을 그려낸 그림을 몽타주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영화에서 몽타주라는 용어는 쉽게 말해 ‘이미지를 이어붙이는 방식’을 의미한다. 떼어놓고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A라는 이미지와 B라는 이미지를 이어붙여 C라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변증법’이라고 한다. 여기 A, B, 두 장의 사진이 있다. A는 경찰들이 바닥에 놓인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사진이고, B는 누군가가 눈을 감고 바닥에 누워있는 사진이다. 이 두 사진이 연달아 제시되면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는 거의 자동화된 유추과정을 통해 ‘누군가가 죽어서 경찰들이 조사하고 있다’는 C라는 전혀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 의미는 A, B 사진 자체가 주는 정보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것이다. 이런 의미생성 과정은 영화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일어나며, 그렇게 보면 영화 전체가 몽타주로 구성되어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적 몽타주는 예에서 든 것처럼 시각이미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청각이미지들 사이에서도 가능하며,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더 블루스>의 이야기는 오래전에 죽은 블루스의 전설, 블라인드 윌리가 우주에서 말하는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우주선 보이저호에는 지구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그의 음악이 실려 있다. 혹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외계인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중간 중간에 이야기 덩어리들을 연결하기 위해 사용된 우주이미지가 화자로서 블라인드 윌리의 위치를 확고하게 한다. 전반부의 진행방식은 비교적 간단하다. 배우들의 연기로 재구성한 화면(영상자료가 블라인드 윌리의 경우 전혀, 스킵의 경우 말년에 찍은 것 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감독은 이들의 이야기를 무성영화처럼 보이게끔 재구성했다)을 배경으로 블라인드 윌리와 스킵의 노래가 흐르고, 같은 노래를 부르는 후대 음악가들로 연결된다. 가끔 노래가사의 내용과 관련된 당시의 영상자료가 끼어든다. 이 몽타주 방식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명백하다. 두 사람의 블루스 음악이 흑인들의 고단한 삶과 역사에서 나왔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중반부에 J.B.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재미있어진다. 실제로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J.B.의 모습을 찍은 화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의 힘이다. 어떤 연기도 실제 분량보다 생생하고 흥미진진할 수는 없다. 당시 영상자료와 실제 현장음, 효과음도 좀 더 자주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전반부와 같은 의미를 전달하지만, 인터뷰 등 새로운 요소들이 끼어들어 몽타주의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후반부에 오게 될 블루스의 질적 변화를 예고한다. 60년대부터 블루스는 미국의 사회현실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발언하게 된다. 감독은 이것이 블루스의 필연적인 발전과정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영화의 초반부에서부터 블루스가 흑인들의 삶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러닝타임이 1시간 20분을 넘어서면서 마침내 필자가 이 글을 헌사로 바치고자 하는 클라이맥스 10분이 시작된다. 베트남전쟁과 인종문제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는 J.B.의 블루스 명곡 네 개가 연달아 울려 퍼진다. 먼저, 카산드라 윌슨이 느리고 처절하게 부르는 <베트남 블루스(Vietnam Blues)>가 베트남전 영상자료, 헬기소음, 폭음을 섞어 ‘형제들을 죽이는 줄도 모르고 싸우는’ 고독한 전쟁을 고발한다. 조금 더 빠른 리듬으로 이글 아이 체리가 부르기 시작한 <미시시피에서(Down in Mississippi)>를 J.B.가 좀 더 힘찬 느낌으로 받아 부르면서 현장음과 함께 거리를 행진하는 KKK단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교차편집(번갈아 보여주는 것)되고, 좀 더 빠른 <앨라배마 블루스(Alabama Blues)>로 연결되면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확신에 찬 육성과 연설모습이 관객들의 심장을 때리며 오버랩되기 시작한다. J.B.는 노래한다. ‘신이시여, 언젠가 떨쳐 일어서시어 내 형제들을 평화의 땅으로 이끄소서.’
톤을 높여가며 이어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육성을 배경으로, 가장 빠르고 경쾌한 리듬의 <고래가 나를 삼켰네(The Whale Has Swallowed Me)>를 부르는 J.B.는 이제 역사발전을 낙관하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고래 한 마리가 깊고 푸른 바다 속에서 요나를 삼켰다고들 하지. 가끔씩 나도 그런 웃기는 느낌이 들어. 그 늙은 고래가 나를 삼킨 거 같은. 만약 내가 산다면, 기도해, 만약 내가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믿어, 언젠가는 마침내 이 언덕을 건널 거라고. 나는 정말 믿어, 언젠가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안식을 취할 거라고. (간주가 이어진다. J.B.가 기타에 입을 맞춘다. 역사적인 워싱턴 집회에 모인 인산인해의 젊은이들이 인종의 경계를 넘어 손에 손을 맞잡는다. J.B.가 장난스럽게 기타를 어깨에 걸머진다. 집회에 참석한 젊은 연인들이 어깨동무를 한다. 당시 미국 시민운동의 상징적인 노래인 <우리는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가 영상자료 현장음으로 흘러나온다) 나는 그 고래가 병들었다고 믿어. 그러니까 내가 이런 블루스를 부르지. 나는 정말 믿어, 그놈이 언젠가는 마침내 나를 토해낼 거라고.” 필자는 최근에 이렇게 힘차고 아름다운 몽타주를 보지 못했다.
죽은 블라인드 윌리를 화자로 내세운 건 그렇다 쳐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를 광대무변한 우주의 모습과 오버랩 시킨 채 노래 부르게 한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한 연출’이다. 블루스가 ‘우주의 노래’인가? 감독 빔 벤더스는 자신이 빠진 논리적 문제 때문에 이런 관념적인 해결책을 생각해낸 것 같다. 자신이 영화 속에서 주장한 ‘삶으로부터 나오는 블루스’를 미국과 서구사회의 현재와 미래에서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게 그의 딜레마였던 것 같다. 왜 그것을 제3세계의 음악에서 찾지 않았을까? 아쉬움은 있지만, 그 정도의 ‘오버’는 충분히 눈감아줄 수 있다. 클라이맥스 몽타주 10분이 너무나 힘차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10분이 모든 사소한 단점들을 극복하고, <더 블루스>를 가난했지만 진실했던 예술가들의 끈끈한 삶이 담긴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는 극장에 없다.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다. 영화는 생활의 먼지 속에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 벽에 막 생기기 시작한 균열 위에 있다. 영화는 ‘소통’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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