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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선배가 <객원기자 이산하 시인이 만난 사람>이란 제목으로 문화일보에 부정기적으로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12월 23일자에 도정일 교수와의 대담이 실렸길래 옮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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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기자나 출판 편집자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았다.
“원고 더럽게 받기도 힘들지만 또 받으면 더럽게 좋은 원고”
그 ‘악명’ 높은 필자가 바로 경희대 영어학부 도정일(62) 교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83년 봄이었다. 80년 ‘민주화의 봄’이 ‘광주 5·17’로 무참하게 꺾이자 그 피눈물을 삼키며 학생운동권이 간신히 일어서던 때였다.
그때 미국 유학에서 갓 돌아온 40대 초반의 한 영문과 교수가 ‘문학사상사’라는 제목으로 ‘겁 없이 마르크스를 강의’하는데, 도강생들까지 몰려들어 교실이 꽉 찬다는 소문이 돌았다.
첫 인상이 영문학자라기보다는 실존주의자나 노장철학자로 보이는 묵직한 저음의 그 교수는 실제로 ‘마르크시즘 문학론’을 ‘참칭’하며 레닌과 루카치, 알튀세르 같은 마르크시스트들의 로드맵을 정말 겁없이 열강하는 것이었다.
암울한 교실에서 이론적 갈증을 풀 수 없었던 그 시절, 우리는 그 강의를 ‘도 교수의 강의를 몰래 듣고 강을 건넌다’고 해서 ‘도강도강도강(都講盜講渡江)’이라 부르기도 했다.다음 해 ‘지하신문’ 건으로 내가 수배된 이후에도 도 교수와의 ‘접선’은 계속 되었다.
때로는 그의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피신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의 월급을 거의 반이나 차압해 총학생회장 선거의 운동권 후보 ‘비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의 제안으로 ‘불온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1986년 녹두출판사에서 번역 출판돼 운동권의 필독서가 된 루카치와 알튀세르 공저인 ‘레닌’이 바로 그 책이다.)
그 도 교수를 지난주 인사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책에 ‘미쳐’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다.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아직…”이라고 하던 유머가 생각난다. 3년 전부터 ‘책 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의 공동대표를 맡아 책 읽기 운동을 전개해 오는 이유는.
“책은 인간이 기억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밥그릇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해 제대로 인간다운 꼴을 갖추려면 사유하고 성찰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의 꾸준한 책 읽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나 학교도서관이 너무 부족하다.
우리가 학교도서관을 살리고 공공도서관을 확충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 모두에게 지식과 정보와 표현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 제대로 된 창조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또 이것이 기왕의 독서운동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1만달러의 국민소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이 없어도 누구나 책을 통해 정보격차를 줄이며 지적 자기 개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운동은 경박하고 천박한 우리 문화풍토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본부의 모토가 ‘깨어있는 시민, 성찰하는 인간, 생각하는 사회’이다.”
―‘기적의 도서관’은 기적(汽笛)을 울리고 있는가.
“전국으로 열차가 달리고 있는데 호응이 아주 뜨겁다. 시멘트가 아니라 온돌방으로 된 기적의 도서관에는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책에 대해 얘기하는 ‘이야기방’ ‘영아실’ ‘다목적실’ 등의 다양한 방들이 꾸며져 있다. 맞벌이부부는 아이들을 하루 종일 이 도서관에 맡겨놓아도 될 정도다. 책 읽는 사회가 육아의 책임을 분담하며 엄마 노릇까지 하는 것이다. 이 ‘사회적 모성’은 결과적으로 출산율을 높이게 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여성부도 관심 가져야 할 것이다. 종합하면 국민운동이나 기적의 도서관은 일종의 ‘반소외 프로젝트’이다.”
―자라는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우선 부모들이 책 읽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뭘 읽어야 들려줄 이야기가 있지 않겠는가. 마르케스는 어릴 때 할머니의 무릎에서 들은 이야기가 자양분이 되어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쓸 수 있었고, 책을 많이 읽은 괴테의 어머니가 매일 밤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를 하며 어린 아들의 꿈과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괴테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나라의 모든 부모들에게 괴테 어머니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밤마다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다.’”
―올 4월부터 ‘북스타트운동’도 시작했는데.
“1992년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영·유아를 위한 캠페인으로 어린이에게는 책을, 부모에게는 교육에 필요한 자문에 응하는 운동이다. 우리나라는 생후 1년 미만의 아기들이 유아기에서부터 ‘책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책과 친숙해지고 소리에 대한 감성, 언어습득, 집중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올 4월 1일부터 서울 중랑구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앞으로 이 시범사업에 대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국제심포지엄 등을 거쳐 북스타트를 전국 주요지역으로 넓혀갈 계획이다.”
―내년부터 MBC 느낌표의 ‘책책책’ 코너가 폐지되고 새롭게 개편된다는 기사가 나왔다. 지금까지 총 26권이 선정돼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출판의 양극화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느낌표 선정은 결코 출판사들의 수익을 위해 기획된 프로가 아니다. 우리 ‘책 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의 취지에 맞추어 독서인구의 저변을 확대해 전체 독서 시장의 파이를 키우자는 데 큰 뜻이 있다. 출판인들의 좀 더 큰 시야가 아쉽다.”
―출판 에디터들은 전체 출판의 흐름을 짚으며 나름대로 다가올 ‘화두’를 예측해 기획한다. 몇 년 전에 ‘공룡’이라는 화두에 이어 ‘신화’가 왔다. 그런데 갑자기 느낌표가 떠 ‘진공청소기처럼’ 시장을 확 빨아들이면서 그 다음에 올 화두를 잡을 수가 없었다.
“출판 에디터들의 기획력을 무력화시킨 점이 없지 않다. 거듭 강조하지만 좀 더 멀리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워낙 로비와 비자금으로 썩어 있어서 그런지, 느낌표 선정과정에 대해서도 미심쩍어하는 출판인들이 없지 않다. 선정과정을 자세히 밝혀달라.
“국민운동에서 5권을 선정해 느낌표 측에 보내면 거기서 다시 ‘5인 선정위원회’에 개별적으로 보낸다. 나도 그 5인 중 한 명이다. 이 5인 선정위원회에서 각자 한 권씩을 추천하는데, 가장 많이 추천된 책이 최종 선정된다.”
-그 5인의 선정위원들은 누구인가.
“나 이외의 4명은 나도 모른다. 그 4명도 서로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1차 선정된 5권의 책들은 각자 따로 택배로 보낸다. 서로 알아서도 안 되고 모여서도 안 되는 위원회다.”
―아직까지 정말 한 사람도 모르는가.
“전혀 모른다.”
―그럼 책임PD의 역할은 무엇인가?
“제작 외에는 전혀 없다. 다만 시기와 정서에 따라 큰 범위에서 소설이나 동화, 시집, 과학대중서 등과 같이 어떤 분야로 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는 정도다.”
도 교수는 그 동안 학자와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민감한 문제에 대해 그때마다 날카롭게 발언해 왔다. 90년대 초 포스트모더니즘의 유령이 배회할 때는 ‘거품 같은 이론이 제 무덤을 팠다’며 격렬하게 비판했고 또 신지식인, 환경문제,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정작 본업은 문학평론가인데, 거의 개점휴업 상태이다.
―문학을 뒷전으로 밀어놓은 데 대한 부담감이 있을 텐데.
“특별히 관심을 쏟아야할만한 작품도 없었지만…. 어쨌든 한국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방기한 점이 없지 않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5~6년 동안 깊이와 재미를 겸비한 저술 활동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하나의 주제를 체계와 방법론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쓸 생각이다. ‘한국문학은 왜 성장을 멈추었는가?’ ‘왜 걸작이 나오지 않는가?’와 같은 문제도 짚어져야 될 것이다.”
―입맛이 아주 까다로운 건 알지만, 그래도 인정할 만한 작가가 우리나라에 한 명도 없는가.
“괴롭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꽤’ 문명을 날렸다는데, 시나 소설을 다시 한번 쓸 생각은.
“허―신의 노여움을 사느니 차라리 가만 있는 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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