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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스코어 - 519
“...'눈사람'도 만났어요. 이것은 제가 붙인 별명인데, 그냥 눈사람의 이미지입니다.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고, 햇빛 속에서 순식간에 제 몸을 흔적 없이 다 녹여낼 수 있는, 자기를 비워버린 순정함 같은 것. 너무 많은 눈사람들이 ( )이 이 어려운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 영혼을 다치지 않고 살고 있었어요. 그냥 자유인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아주 겸허히 묵묵히 살고 있었어요...”
한 여자가 있었다. 작고 가냘파 보이는 여자였다. 한 번쯤 할인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지나쳐갔을 법한, 평범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사랑에 빠졌던 거 같다. 위에 인용한 것은 그 여자가 쓴 연애편지다. 괄호 안에 들어갈 단어는 그 여자가 사랑한 대상인 거 같다. 말투나 내용에서 소녀적 감수성과 순수함이 묻어나지만 사실 중년여자다. 누굴까?
지난 7월 29일 오전, 과천정부종합청사에서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퇴임식을 가지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위의 연애편지는 바로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지난해 6월, 검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전국의 모든 검사들에게 보낸 것이다. 괄호에 들어갈 단어는 ‘검찰’. 이 편지에서 강금실 전 장관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수한 검사들을 ‘눈사람’에 비유했다. 이번 주 파이널 스코어는 취임부터 퇴임까지 숱한 화제와 일화를 뿌렸던 강금실 전 장관이 법무장관으로 재직했던 날수인 519다.
강금실 전 장관은 취임부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최연소였고 최초의 소장판사 출신이었고 재야단체로 인식되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이었으며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이었다. 가수 이효리에 비유되어 ‘강효리’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고 여러 난관을 씩씩하게 극복해나가는 모습에 ‘굳세어라 금실아’라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왜 그렇게 많은 국민들이 강금실 전 장관을 좋아했을까?
강금실 전 장관이 해낸 가장 중요한 일은 완전한 검찰 수사권의 독립이다. 검찰 수사에 대해선 정치권의 영향력을 철저히 차단하고 검찰총장에게 맡겼다. 결과적으로 사상 유례가 없는 대선자금수사를 성역 없이 이뤄냈고 현직대통령 측근들까지 ‘법대로’ 줄줄이 구속시켰다. 세대교체 인사를 단행했고 상명하복 규정도 없앴다.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자문기구인 정책위원회에 법무부의 주요 정책결정을 사실상 맡김으로써, 피의자와 재소자의 인권보호조치 추진, 호주제 폐지 추진 등 여러 인권보호조치를 도입하게 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꿋꿋한 소신과 강단 있고 당당한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서열파괴인사로 촉발된 평검사와의 공개토론에서도 차분하면서도 치밀한 논리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성장관이라서 그랬는지, 대놓고 반말하는 남성 국회의원에게는 똑같이 되돌려줘서 국회를 웃음바다로 만들고 대한민국 여성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했다. H의원 - "이봐요. 장관! 잘 들어라." 강 장관 - "지금 잘 듣고 있다." K의원 - "장관은 들은 적이 있는가." 강 장관 - "지금 들었다." 모 의원 - "장관 답변하라." 강 장관 - "답변하겠다."
많은 국민들이 강금실 전 장관을 좋아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누구를 대하든 격의 없고 자유분방한 말과 풍모였다. ‘눈사람’ 같은 인간미였다. 그는 진짜 ‘강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입고 싶은 옷을 입었고 국회 안에서도 콤팩트를 꺼내 화장을 고쳤으며 국제회의장에서 전통무용을 보여주기도 했다. 불화설이 떠돌던 검찰총장과의 회동에선 먼저 팔짱을 끼고 “우리는 원래 잘 맞았다”며 배시시 웃었고, 국회 법사위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불러다 앉혀놓고 사소한 문제로 설왕설래하자 “코미디야, 코미디”하며 웃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소개한 것처럼 진심과 애정을 담은 예쁜(?)편지를 쓰기도 했다.
퇴임 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일단 좀 놀아야죠”라고 대답하는 뒷모습도 참 강금실답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이 시대의 진짜 멋진 여성상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강금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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