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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다 기른 적이 있다. 이름은 ‘몰라’였다. 왜 그 녀석의 이름을 몰라라고 지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몰라는 연한 갈색 바탕에 밤색 줄무늬가 있는 암컷이었다. 학업 때문에 난생 처음 혼자 살던 당시에, 나는 문득 외롭다는 느낌에 사로잡혔고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계에 있어서 사람보다 문제를 덜 일으키고, 상대적으로 내가 우월한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이 좋겠다 싶었다. 개를 먼저 떠올렸지만, 집을 자주 비우는 습성을 가진 내가 사회적인 습성을 가진 개를 기른다는 건 아무래도 개에게 너무 잔인한 일로 느껴졌다. 배설물의 처리도 문제였다. 다음으로 떠올린 것이 고양이였다. 고양이에 대해 편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비교적 그런 편견이 적었다. 고양이는 개보다 독립적이어서 자주 같이 놀아주지 못해도 덜 미안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배설물을 스스로 처리할 줄 아는 멋진(!)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2.
새끼일 때 몰라는 항상 내 곁에 있고 싶어했다. 내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아리에 몸을 비비며 반겼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지 늘 궁금해했다. 잠잘 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몰라는 자꾸 내 이부자리로 파고 들어와 품에 안기려고 했다. 나는 몰라를 밀쳐냈다. 그 손바닥만한 어린 생명이 자칫 내 몸뚱이에 깔려 죽게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몰라는 아무리 밀쳐내도 끈질기게 내 품을 원했다. 단호한 어조로 야단을 치고 화난 표정을 지어 보여도 소용없었다. 더욱 애틋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 슬픈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번은 그런 일로 아옹다옹하며 잠을 설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녀석을 거의 집어던진 적도 있었다. 녀석은 고양이답게 무사했지만, 나는 두고두고 그 일을 후회했다. 어쨌든, 초장에 버릇을 들이고자 한 내 계획은 성공해서 녀석은 곧 어디가 자기 잠자리인지 알게 되었다. 내 첫 번째 승리! ^^v
몰라는 가끔 사료를 끄집어내서 가지고 놀았다. 신성한 먹이를 가지고 놀다니! 나는 녀석의 버릇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곧 응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를 때마다 나는 반복해서 사료를 가리키며 녀석을 야단치고 다시 밥그릇에 주워담았다. 내가 싫어하는 걸 알아챈 것 같았지만, 녀석은 끝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고양이들에게 먹이란 사냥을 해서 얻는 것이니 저런 행동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닐까? 사람은 먹을 것을 경건하게 먹기만 하나? 배고프면 사과를 먹어치우겠지만 심심하면 그 사과를 가지고 저글링을 연습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은 저글링을 하다 사과가 많이 상하면 그냥 버리지만, 몰라는 사료를 가지고 놀다가도 나중에 그걸 먹지 않는가? 나는 내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몰라의 승! ㅜㅜ
놀이시간을 정하는 문제는 ‘서로가 원할 때’라는 대원칙 하에 무난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가 약간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몰라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호기심이었다. 녀석은 자기가 내키지 않으면 아무리 불러도 나를 소 닭 보듯 하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녀석의 부드러운 털가죽이 그리운 나는 몰라 몰래 비장의 무기를 꺼냈으니, 다름 아닌 비닐 포장지였다. 녀석이 보이지 않게 비닐을 구겨 ‘바스락’ 소리를 냈다. 잠들어 있다가도 녀석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고,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나는 모른 척 했다. 잠시 후 다시 바스락... 녀석은 곧 소리가 나는 위치를 감지하고 몸을 낮추고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왔다. 팔이 닿는 위치까지 다가오면... 잡았다! 본능은 어쩔 수 없나보다. 녀석은 매번 당해도 매번 속았다. 나의 판정승! ^^v
녀석은 내가 놀아주지 않으면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내가 깎아버린 발톱을 세웠고, 그것도 싫증나면 창 밖을 바라보길 좋아했다. 문제는 창가에 가스레인지가 있어서 녀석은 항상 그 위에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라면이라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를 점화하면 ‘지직-’ 소리와 함께 녀석의 털이 타는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왜 하필 가스레인지인가? 성질 같아선 그 상태에서 확 불을 붙여버리고 싶었다. 참 오랜 갈등이 있었다. 결국은 나의 포기. 일단 포기하고 나니, 가스레인지 위에서 꼼짝 않고 창 밖을 바라보는 몰라의 모습이 때로는 슬프거나 우울해 보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지난한 투쟁 끝에 몰라의 승! ㅜㅠ
3.
식료품을 구하러 시장에 갔다가 검은콩을 사온 적이 있었다. 나도 일부를 먹긴 했지만 처음부터 먹으려고 산 것이 아니었다. 찬거리를 사러 갔다가 우연히 나무 박스 안에 담겨진 검은콩을 보게 된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한 알을 집어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웠다. 나는 돈과 맞바꾼 콩을 집으로 가져왔다. 오목한 접시 위에 한 줌을 담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위 접시 위에 담긴, 검고 동글동글한, 난생 처음 보는 물체들이 몰라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지는 이해가 된다. 녀석은 그 신기한 물체들을 접시 밖으로 끄집어내서 가지고 놀았다. 나는 몰라의 그 행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콩을 도로 다 주워담고 몰라를 야단쳤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몰라도 자신이 콩을 가지고 노는 것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내가 책상에 앉아 뭘 하고 있거나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면, 몰라는 콩 따위에 대한 모든 관심과 유혹을 끊고 착하고 말 잘 듣는 ‘새고양이’로 거듭난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내가 책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다른 일에 열중해 있거나 잠들어 있다고 판단될 때, 몰라는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책상 위로 갔다. 한 알. 몰라는 정확히 한 알의 콩을 앞발로 조심스럽게 접시에서 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똑, 똑, 똑, 또르르...
어지간히 깊은 잠에 빠져있지 않는 한, 고양이가 아닌 인간의 청각 능력으로도 둘만 있는 방안의 딱딱한 바닥에서 콩 튀는 소리를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몰라는 몰랐던 것 같다. 몰라는 자신이 떨어뜨린 콩 한 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실험과 장난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러다 도로 끄집어낼 수 없는 옷장 밑이나 가구 틈으로 콩이 들어가 버리면, 다시 흘끔흘끔 나의 동태를 살피며 살금살금 책상 위로 가서 다른 콩 한 알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검은콩은 온전히 몰라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날마다 몰라는 내 눈치를 보며 콩을 한 알씩 떨어뜨려 가지고 놀았고, 날마다 나는 숨어버린 콩들을 끄집어내 책상 위 접시에 도로 담았다. 가끔씩 나는 영구히 분실된 콩들을 대신해 접시에 새로운 콩들을 보충해 넣었다. 승패가 의미 없는 결과였다.
4.
내가 몰라와 동거하며 깨달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편견은 접촉의 부재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노려보는 것은 놈들의 본능일 뿐이라는 걸, 동물들도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는 걸, 직접 접촉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접촉의 기회가 현저히 적거나 있다해도 거부하는 편협한 자세에 있다. 둘째, 사람이건 동물이건 함께 살기 위해서는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체가 다르면 원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매우 당연한 얘기 같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싫어도 상대방이 간절히 원한다면, 또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면 과감히 내 의견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사는 일이 행복해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몰라에게 감사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 몰라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주었던가!
지금 한반도에 조성되어있는 긴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힘으로 억누르고 강요하려 해서는 안 된다. 쌍방이 서로를 좀 더 이해하려는 노력을 바탕으로 타협해야 한다. 좀 더 자주, 좀 더 많이 서로를 접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양쪽이 함께 살 수 있다. 관객 여러분들이나 제작자, 투자자 여러분들이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 나라 영화는 다 뻔하냐고 말씀하시지만 말고,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당장은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다른 종류의 영화들을 보려고, 만들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코미디 일색이 아닌,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이 있는 영화계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한국관객도, 한국영화도, 한국제작자, 투자자도 함께 살 수 있다. 그 결과는 관객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으로, 제작자, 투자자에게 기름진 산업적 토양으로 온전히 되돌아온다.
5.
몰라는 잠들어있지 않았다. 몰라는 가끔씩 물을 마시며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가스레인지 위에 앉아 한동안 거리를 내려다보았고, 이젠 자리에 누워 숨을 쌔근거리고 있지만, 잠든 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몰라도 내가 잠들어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까? 아마 알았을 것이다. 새벽의 침묵 속에서 몰라의 숨소리와 내 숨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그 리듬은 몰라와 내가 떨어져있는 만큼의 물리적 거리 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의 가까움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아니, 일종의 공간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한 존재의 공간과 다른 존재의 공간 사이의 기묘한 공간감.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창 밖에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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