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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5-10 18:36:19 / Hit:1518  

<나무에게 듣는다>에 대해

나무에게 듣는다


겨울, 눈내린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
적멸로 가는 입구 같다
나는 함부로 걸음 내딛지 못하고
키 큰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자신이 시작된 자리에 서서
삶을 통째로 견디는 나무들
그래서 이렇게 높고 곧은가

오갈 데 없는 희망이
나를 탕진했다
오래 길 위에 머물렀지만
나는 어디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종착을 모르는 소란스러운 발걸음아
네 마음 어디에 고요가 깃들 수 있을까
전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리며 내게 묻는다
나는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에 주저앉아
나지막이 지나온 날들을 더듬을 뿐이다

고개를 수그리고 일어나 걸음을 돌리다
그루터기에 새겨진 나이테를 본다
해마다 더해졌을 동심원들이
한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다
너 또한 경사진 마음이구나
한 자리에 오래 서서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여기 아닌
다른 어딘가로 마음 기울였던 흔적
핏물처럼 네 몸 속에 번져 있다
기울기의 간격이 해마다 넓어질수록
마음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다시 걸음을 돌려 숲길로 들어선다
쌓인 눈 밑의 얼음에는 잠시
몸을 휘청거려주면 된다



  이 시 역시 호남이다운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 시입니다. 아쉬운 부분만 짧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제의 선택
  도입부를 미루어 짐작컨대, 이 시는 작가의 내소사 여행에서 얻어진 시인 듯. 이런 종류의 여행시들, 너무 많습니다. 여행의 어떤 부분에서 삶의 진리를 떠올리는 전개의 시들 말입니다. 주로 나이든 시인들이 이런 시 많이 쓰죠. 쓸 거리가 바닥난 늙은 시인들, 시 쓰려고 여행만 다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참신한 발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 노인 시
  위에서 말한, 여행시들과도 관련 있는 말입니다. 늙은 시인들이 자주 쓰는 여행시에다가, ‘나지막이 지나온 날들을 더듬을 뿐이다’ 등으로 펼치는 과정이 늙은 느낌이 납니다. 호남인 아직 피 끓는 젊음이죠.

3. 안이한 시의식
  시의 내용상 흐름을 따라가 보면,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괴로워하던 작가는,(문제의 등장) 나무의 나이테를 보고 반성하고 삶에 대한 투쟁심을 되찾습니다.(문제의 해결) 문제를 해결하는 정신적 과정이 안이합니다. 정말 문제가 괴롭고 심각한 것이라면, 흔히 많이 보아온 시들에서처럼, 나이테에 바로 충격 먹고, 반성 들어가고, 의욕 되찾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시 속에서 맞부딪치는 일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많이들 대충 피해 가거나, 이 시에서처럼 흔히들 많이 써먹는 방식을 자동적으로 동원해서 마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매끈해 보이게 합니다. 백이면 아흔 아홉이 그렇게 합니다. 뻔한 시가 되고, 읽는 맛이 떨어집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치열한 시의식이 필요합니다.

4. 상투적인 표현
  ‘오래 길 위에 머물렀지만 나는 어디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같은 표현은 많이 보아온 상투적인 표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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