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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호남이 시들을 대하니 기분이 좋고, 그 시들이 읽을 만해서 또 기분이 좋습니다. 솔직한 제 감상을 올립니다. 아마도 결과적으로, 제 개인적인 시관(詩觀)이나 주장하는 꼴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선배라고, 먼저 등단했다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잘난 척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제가 하는 말이 모두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틀릴 수도 있고, 오해에서 비롯된 실언일 수도 있고, 단지 기호와 개성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호남이를 비롯해, 제 감상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으신 분들은 부담 없이 덧글을 달아주시고, 함께 마음과 생각을 열고, 내가 틀리고 상대방이 맞을 수도 있다는 호방한 자세로 얘기해봤음 좋겠습니다.
이번에 신작 세 편을 읽고 새삼 느끼는 건데, 호남이의 시는 상당한 숙련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지요.
‘고래 꿈’은 역동적인 이미지와 긴장감이 비교적 잘 살아있는 시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부분이 이 시의 장점인 것이고, 작가는 당연히 수정을 할 때 그런 장점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그런데 왜 역동적인 이미지와 긴장감이 살아있을까요? 바로,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 ‘고래와의 결투’ 등, 그럴 만한 소재, 즉, '시의 씨앗’을 가지고 써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소재와 씨앗을 발굴해 낸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안목과 감각이고,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작살로 찌르자 고래기름이 바다에 흥건하게 번지는 이미지는 압도적입니다.
1. 주제의 선택
‘고래 꿈’은 시쓰기에 대한 시로 보입니다. 여기에 저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시쓰기에 대한 시, 물론 쓸 수 있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알게 모르게, 그런 시를 ‘고급시’로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죽은 19세기 상징주의의 시체와 동침하고 있는 용감한(?) 사람들이지요. 시는 물론 개인적인 작업이지만, 또한 누구에겐가 읽힐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걸리고 차이는 게 시인이지만, 모두 합쳐 얼마나 될까요? 최대로 잡아, 2만? 3만? 물론 적지 않은 숫자이지만, 남한 인구가 4천 7백만인가 되는데, 거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극소수입니다. 과연 나를 위해서, 또는 극소수인 시인들에게 읽히려고 시를 써야 할까요? 물론 4천 7백만 대부분이 시를 읽지도 않을 뿐 아니라, 모두들 바빠서 진지한 시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습니다. 저는, 그렇더라도 작가는 일반인 대부분을 잠재적 독자로 설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반인들이 읽기에 지금 쓰고 있는 시가 어려울 수도 있고, 관심 밖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그 내용적 본질에 있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어서,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 스스로 공감과 감동의 폭을, 독자의 폭을, 나아가 확장성과 시적 보편성을 제한하게 되는 우스운 꼴이 연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런 글은 쓰지 말라? 아닙니다. 얼마든지 쓸 수 있죠. 하지만, 방법을 좀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래 꿈’처럼, 누가 봐도 ‘이건 시쓰기에 대한 시군’이라고 느껴지는 방식이 아닌, 일차적으로, 일반적인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 한 가지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이 시에서 ‘펜촉’, ‘언어’, ‘말’ 등 글쓰기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제거하고 읽어보죠. 그래도 훌륭한 시로 성립하며, 그래도 어떤 의미를 가집니다. 주제? ‘뭔진 확실히 모르겠지만, 뭔가를 달성하려는 인간의 노력’ 정도로 읽히겠죠. 그러고 보니, <노인과 바다>가 비슷한 주제네요. 예술에서는, 더구나 시에서는 주제가 꼭, 반드시 구체적이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앞의 것 정도로 일반적이어도 되고, 아예 이미지만 주어도 됩니다. ‘시쓰기에 대한 시’라는 애초의 생각은 작가의 가슴 속에 있으면 됩니다.
2. 선시 풍
언제부턴가 호남이의 시에서 선시 분위기, 내지는 불교적 이미지나 용어가 자주 눈에 띕니다. 따지고 보면, 현재 한국시의 한 경향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 전체를 구도의 과정으로 보는 불교적 인생관도 좋고, 차이를 없애고 경계를 지우려는 불교적 세계관도 좋습니다. 그런 것들은 시 속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분위기를 풍긴다고, 이미지나 용어를 사용한다고 그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늙으나 젊으나, 한국의 많은 시인들이 바로 그 점을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도 수양하면 부처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까진 일차적으로 평범한 인간의 한 부류인 시인이고, 그렇다면 내가 발 디디고 있는 하계로 언어와 이미지로, 생활의 언어와 이미지로 시를 써야 합니다. 막말로, 기독교인은 시 읽지 말라는 말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런 것들은 시 속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괜히 분위기나 풍기고 이미지, 용어나 슬쩍 끼워 넣는 것은 자신의 작가적 무능력을 인정하는 꼴입니다. 옛날 선사들이 선시 썼던 건, 그 분들, 자신이 '시'를 쓰고 있다는 자각, 자신이 '시인'이라는 자각이 없었거나, 또는 그런 것들이 스스로에게 무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말해, 작금의 선시 풍은 시의 죽음입니다. 무덤입니다. 남들이 마르고 닳도록 간 뻔한 길을 가는 건, 시 쓰는 사람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남이 시가 완전히 그런 관습에 빠져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알게 모르게, 그런 분위기를 조금 띠고 있다는 겁니다. ‘침대가 山頂이다’라는 어투의 은유, ‘경지’, ‘生’ 등의 추상어들이 그렇습니다. 들어내거나 다른 말로 바꾸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生’이라는 말을 시에서 보면, 현기증이 납니다.
3. 자기연민
호남이 시에 나타나는 또 다른 분위기입니다. 자기연민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어쩌면 시의 출발점이 자기연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정신이 항상 출발점에 머무르고 있다면 조금 생각해봐야 할 듯 합니다. 저는 글쓰기나 인생을 구도의 과정과 완전히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정말 좋은 글은 그 이상의 정신적 성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연민, 이거 정말 극복하기 힘든 정신적 과제입니다. 저도 힘들고, 글을 쓰는 누구나가 힘들어합니다. 아마도 평생 조금씩이나마 극복해 간다면 다행인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우리는 ‘나 힘들어’, ‘아파 죽겠어’라고 말하는 시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으며, 그런 시들을 보며 가끔 측은함과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찡찡대는 것 같아 짜증이 나기도 한다는 겁니다.
‘고래 꿈’에서는, 처음의 두 문장, ‘오늘도 말없는 하루였다. 침묵으로 몸을 말고 새벽녘에야 잠든다.’가 그런 분위기를 풍겨서 전체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문장은 들어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오후의 햇살이...’로 시작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4. 추상어
추상어를 피하고 구체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 는 사실은, 시쓰기에 있어 굉장히 기본적인 사실임에도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글을 쓰면서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들로서 그 ‘추상’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불교용어가 대표적인 추상어이고, ‘고독’ 등의 말도 그렇습니다.
5. 단정적인 표현
‘A는 B다’는 은유, 그 중에서도 단정적인 은유는 잘 사용하면 효과적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지나치게 고집스럽게 들리거나, 이미 결론을 내린 듯 보여서 재미가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선시 풍, 불교적 분위기의 진술방식에서 그런 것들이 많이 보여집니다. 이래저래 자꾸 언급하게 되는 걸 보면, 제가 정말 선시 풍, 불교적 분위기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요.
‘고래 꿈’에서는, ‘인간이 거대한 고독에 맞서는 길은 날카로운 도구를 갖는 일’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6. 한자와 어려운 한자어의 사용
이 부분은 개인적인 취향과도 관련된 부분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신문에서도 한자가 사라진 마당에, 시에서 한자나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는 게 과연 올바른 접근인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시의 성취는 한자나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고가 아니라, 내용과 형식에 있어 얼마나 새롭고 의미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굳이 거부감을 가진 사람도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독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한자나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대한 쉬운 말, 일상어를 골라 쓰려고 노력합니다.
‘고래 꿈’에서는 ‘山頂’, ‘大洋’, ‘接神’, ‘生’, ‘고립무원’ 등의 말이 걸립니다. ‘山頂’을 ‘산꼭대기’라고 쓴다고, ‘接神’을 ‘접신’이라고 쓴다고, ‘고립무원’을 ‘혼자’라고 쓴다고, 의미전달에 있어 어떤 불리한 점이 있을까요? 저는 오히려 더 편하고 좋아 보입니다.
앞서 말한 것들은, 굳이 생각해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고래 꿈’은 전체적으로 읽을 만한 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그렇고, 호남이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쓰다보니 많이 길어졌네요. 앞으로는 요점만 말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간단히 요점만 쓰는 게 읽는 사람에게도 편하잖아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른 생각이 있거나, 제 말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분은 주저하지 말고 덧글 달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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